새해 영화 키워드 ‘시대정신’…봉준호·박찬욱 누가 웃을까

2023. 12. 3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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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극장가가 기사회생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올 한 해 국내 총 관객수는 1억600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 이전엔 2억 명을 웃돌았으니 80% 선이 회복된 셈이다. 올 초반까지 분위기는 매우 우울하고 심각했었다. 극장이 거의 모두 문을 닫을 위기였고 영화 산업 자체가 폐업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특히 ‘거미집’ ‘소년들’ 등 추석 무렵 개봉됐던 영화들이 완성도가 뛰어났음에도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위기 의식은 극에 달했었다.

‘서울의 봄’ ‘노량’ 흥행 덕에 극장가 활기

1 내년 차기작 ‘미키17’을 선보일 봉준호 감독. 2 HBO 시리즈 ‘동조자’ 연출과 직접 제작한 넷플릭스 영화 ‘전, 란’으로 돌아오는 박찬욱 감독. [중앙포토]
그런 분위기를 단 두 편의 영화가 회복시켰다. 현재 ‘서울의 봄’이 1100만을 넘어 가고 있고 ‘노량’도 이런 분위기라면 일단 500만 관객은 떼어 놓은 당상으로 보인다. 두 편의 영화가 산업을 회복시킨다는 점은 영화계가 지닌 생존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 여전히 너무도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두 편의 큰 영화보다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편수의 영화들이 산업의 기둥을 받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어제오늘의 지적이 아니다. 2024년 영화계의 화두를 내부의 누군가는 ‘부활’이라고 잡고 있지만 다시 살아 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살아 나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내년의 화두는 ‘부활’보다 ‘시대정신’으로 보인다. 대체로 영화의 흥행은 낮은 수준에서는 동 세대의 트렌드를 얼마나 잘 캐치하고 있느냐부터 높은 수준으로 볼 때는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과제를 영화가 얼마나 잘, 예술적으로 투영시키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2023년 한해 흥행작 중 전자는 ‘30일’같은 로맨틱 코미디였으며 후자는 ‘서울의 봄’이나 ‘노량’같은 작품이었던 셈이다. 코로나19의 후유증이 엄청났던 2022년 초반에도 ‘헌트’같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2024년 상반기 흥행을 이끌 작품 역시 두 편이다. 해외 작품 한 편과 국내 감독의 작품 한 편이다. 캐나다 드니 빌뇌브의 ‘듄 파트2’는 올 연말에 개봉될 계획이었다가 내년 2월로 ‘도망간’ 케이스이지만 결국 매우 영리한 선택을 한 셈이다. 사실 국내 배급 일정보다는 할리우드의 배우 및 작가 파업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어쨌든 내년 2월이라면 극장가가 무주공산이 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이 ‘듄2’가 독식할 가능성 또한 높게 점쳐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티모시 살라메. 젊은 층을 넘어 주부층 관객들조차 열렬히 사모하는 대상이다. ‘듄’ 전편은 2021년 코로나 한 복판의 띄어 앉기와 1일 저녁 상영 시간 축소라는 악 조건 속에서 개봉돼 170만 정도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지만 이번 ‘듄2’는 2024년 극장가의 확실한 ‘불쏘시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웅장한 비주얼과 인류 구원의 종교적, 철학적 의미 까지를 담고 있는 내용인 데다 요즘의 할리우드가 주요 상품으로 내세우고 있는 ‘반란과 혁명’을 키워드로 삼고 있어 지식인층에게도 꽤나 어필할 가능성이 높다. ‘듄2’는 주인공 폴(티모시 살라메)이 자신의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멸족시키고 왕인 아버지(오스카 아이작)를 살해한 하코네 가문에 맞서 사막의 사람들(배두인 족을 상징)인 프레멘들을 조직해 게릴라 전투를 이어간다는 내용이다. ‘정의를 위한 반란과 혁명’은 국내 극장가에서도 심상치 않은 흥행 코드이다. ‘듄2’는 특히 티켓 값이 비싼 아이맥스 관에서의 상영에 관객이 몰릴 작품이다. 매출액이 더 높아진다는 의미이다.

사진 3 미키17
한국영화는 단연 봉준호의 신작 ‘미키17’이다.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개 부문을 석권하고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인 만큼 이번 새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찍혀졌다. 투자의 상당 부분도 미국 자본이며 배급도 할리우드 메이저다. 주요 투자사는 플랜B이다. 톱스타 브래드 피트의 영화사로, 그는 여기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윤여정) 수상작인 ‘미나리’에도 투자를 했다. 배급사는 워너 브라더스다. 주요 캐스팅 역시 모두 할리우드 배우들이다. 주연 로버트 패틴슨은 2022년 새로 시작한 배트맨 시리즈 ‘더 배트맨’에서 어두운 영웅 배트맨으로 활약 중이다. 국내 팬들에게는 여전히 ‘트와일라잇’의 꽃미남 뱀파이어로 유명하지만 잘 생긴 얼굴이 연기 생활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해 ‘더 라이트 하우스’같은 예술영화 출연도 잦은 편이다. 국내에 팬층이 넓으며 그의 광폭 연기 행보가 봉준호의 눈에 띠었다. 한국 개봉은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를 통해 수입 배급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국내에서 흥행할 경우 그 수익의 반은 미국 자본의 것으로 환원된다.

최민식·박해일 ‘행복의 나라로’도 대기 중

‘미키17’은 원래 『미키7』이 원작이다. 에드워드 애슈턴이 쓴 SF소설이다. 미키7이든 17이든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복제인간의 프린트 넘버다. 7번째 미키이고 17번째 미키라는 얘기이다. 중요한 것은 미키7이 7이 되기 위해서는 미키6이 완전히 소멸돼야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실수인지 고의인지 미키7이 처리되지 않은 채 미키8이 나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7과 8의 기억이 중복되고 그럼으로써 정체성의 일대 혼란이 야기되며 복제인간 사회와 시스템이 점점 교란되게 된다. 아마도 봉준호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의 정체성, 곧 과연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에서 가장 똑똑한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봉준호는 ‘가장’ 철학적이고 ‘가장’ 정치적인 얘기를 ‘가장’ 상업적인 재미로 포장해 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이번 ‘미키17’의 흥행력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 4 동조자
한국에서 가장 스타일리쉬하고 가장 예술적인 감독으로 꼽히는 박찬욱은 얼핏 2024년을 쉬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내년에 그는 극장용 보다는 OTT 영화나 시리즈 드라마에 치중할 것 같다. 그의 기대작은 비엣 타인 응우엔의 퓰리처 상 수상 소설인 『동조자』의 7부작 시리즈 드라마다. 미국 내 플랫폼인 HBO 오리지널 작품이며 제작사는 미국의 A24, 박찬욱 영화사 모호필름 등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산드라 오 등이 나온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북베트남의 밀명으로 남베트남 장군의 비서 장교 역할을 했던 사회주의자 스파이가 계속되는 당의 명령에 따라 그 장군의 미국 망명까지 따라 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공산주의자이지만 남베트남 자본가 군인에게도 ‘동조’된다. 자아는 분열된다. 박찬욱이 가장 잘 하는 이야기이며 가장 좋아하는 스토리 라인이다. 박찬욱은 이 드라마의 ‘쇼 러너 연출’을 맡았고 앞의 3부작은 본인이, 뒤의 4부작은 다른 감독이 연출하도록 총 기획과 시나리오를 썼다. 국내에서는 아마도 TVING을 통해 방영될 가능성이 높다.

박찬욱은 제작 면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는데, 2024년 상반기에 선보일 김상만 감독의 신작 ‘전, 란’은 박찬욱의 영화사 모호필름이 제작하는 것이다. 강동원과 박정민이 나온다. 넷플릭스 공개작이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극장에서 보여지지는 않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관심도를 상당히 높일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국내 영화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24년에는 극장과 OTT가 적대적 공생 관계를 넘어 비적대적 공생 관계로 넘어 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2024년에도 프랜차이즈 흥행 영화가 돌풍을 이어 갈 것으로 보인다.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 시리즈는 이제 나오기만 하면 관객들이 몰리는 것이 사실이다. 이 영화 중 2편과 3편은 모두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번 4편은 5월 개봉 예정이고 이 영화의 5월 배급 전략은 다가오는 여름 시장의 붐을 일으키겠다는 것이어서 그 휘발성이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씨네 파일
많은 팬들이 류승완에게 첩보 스릴러인 ‘베를린2’를 기대하고 있지만 그는 다소 몸을 낮춰 ‘베테랑2’를 만들어 내년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베를린’ 보다 ‘베테랑’이 훨씬 쉽고 대중적이다. 류승완은 한 인터뷰에서 “나 자신도 좀 즐기면서 영화를 찍을 때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베테랑’ 시리즈는 전형적인 액션 프랜차이즈 영화로 2024년의 하반기를 책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도 진작에 완성됐지만 코로나로 3년째 잠자고 있는 최민식·박해일 주연의 ‘행복의 나라로’도 대기 중이다. 외화로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스핀 오프인 ‘트랜스포머 ONE’이 눈에 띈다. ‘글래디에이터2’도 있고 ‘에이리언’ 시리즈의 새로운 작품 ‘에이리언 : 로물루스’도 기다리고 있다. 성찬이다. 세상은 넓고 볼 만한 영화들이 넘친다. 부활하되 어떤 시대정신을 지닌 영화들이 수위를 차지할 것인가. 영화 흥행은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모르는 것이라는 속어가 있다. 그럼에도 많은 영화 팬들이 진작부터 2024년을 기다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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