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이별할 준비
10년 만에 꺼내신은 낡은 신발
힘겨운 걸음마다 콜타르 자국
무심했던 지난날에 눈물이 ‘핑’
구례를 떠나지 않기로 작정했을 때 나는 엄마가 백 살은 너끈히 살 줄 알았다. 1926년생, 올해 아흔일곱, 내년이면 아흔여덟. 어디가 아픈 건 아니다. 그래도 노인네 건강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엄마보다 더 건강했던 친구 한 분은 침대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진 뒤 급속도로 쇠약해져 세상을 떠났다. 무엇보다 겁나는 것은 엄마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엄마 뇌의 변화를 딸인 내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치과는 하필 이 층이었다. 엄마가 계단을 올라 본 게 아마 십 년도 전일 것이다. 업히자고 해도 엄마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난간을 잡고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 계단을 올랐다. 우두커니 엄마를 지켜보았다. 엄마가 내딛는 걸음마다 검은 콜타르 조각이 남았다. 그 흔적이 나의 무심을 비난하는 듯했다. 병원 바닥에도 뭉개진 콜타르 자국이 생겼다. 엄마가 진료를 기다리는 사이 차로 돌아갔다. 강연 다닐 때 가끔 신기도 하는 힐을 신고 내 운동화를 엄마에게 신겼다. 엄마가 진료하러 들어간 사이 콜타르 자국을 물티슈로 박박 닦았다. 검은 자국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엄마가 가고 나면 오늘의 기억이 이 콜타르 자국처럼 마음에 남겠구나,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염증이 잇몸까지 잠식했다고,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의사가 자분자분 말했는데, 그 말이 더 아프게 심장을 후벼 팠다. 이를 뽑고 돌아오는 길, 낯선 상황에 놀란 엄마는 좀 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자꾸만 물었다. “아이, 우리 워디 갔다 오는 질이냐?” 좀 전의 일은 다 잊었으면서 피아골 입구를 지날 때는 아는 체를 했다. “아이고, 피아골이다이. 여그는 알겄다.” 이가 빠져 아이처럼 천진해 보이는 엄마는 젊디젊은 청춘의 시절을 생생하게 회고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이 겨울을 버텨 줄까? 한 해가 저물어가는 요즘, 엄마의 날도 급격히 저물어가고 있음을 절감한다. 엄마의 끝이 머지않은 것 같은데 이상도 하지. 좋은 기억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평생 엄마에게 잘못한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많다. 내 잘못들만 치과 바닥에 남은 콜타르 자국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어쩌면 모든 자식은, 불효자다.
엄마의 끝만 머지않은 게 아니다. 열네 살 말라뮤트 호랑이의 끝이 더 가까울 듯하다. 털이 다 빠진 녀석이 하도 추위를 타기에 닭장에 쓴다는 보온갓을 달고 스티로폼으로 개집 외벽까지 에워쌌는데도 녀석의 수명을 연장하기에는 무리인 모양이다. 그제부터 녀석은 좀처럼 움직이려 하질 않는다. 안아서 일으키면 비척비척 걸어 나가 겨우 대소변을 해결한다. 강아지 때부터 키워 온 녀석과의 행복한 추억도 한 짐인데, 녀석의 죽음 앞에서는 엄마와 마찬가지로 미안한 것만 사무친다. 올해 너무 바빠 산책도 제대로 시켜 주지 못한 것, 녀석 홀로 늙어 가게 한 것, 이 미안함을 어쩌나…. 아직도 나는 이별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내 주변의 것들이 떠나가는 2023년과도.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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