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작은 병원’ 오늘은 우도 앞에 닻 내립니다[아듀 2023 송년 기획-‘전남 511호’ 올해 마지막 항해]
49가구 85명 주민 대부분 고령자들
물때 맞춰 육지 병원 찾기 힘들어
선착장서 수송선으로 이동해 진료
의료인력 8명이 2박3일 일정 진료
내과·한의과·치과 등 3개 진료실
방사선실·임상병리실·약제실 갖춰
시속 33㎞…응급환자 긴급이송도
511호 외에도 서남해 섬 찾는 512호
병원선 두 척에 주민 9173명이 의존
취약지역 전남, 상급종합병원 ‘1곳’
보건의 “의료 소외지역 의사 필요”
전남 고흥군 남양면 우도는 고흥반도와 보성군 사이 득량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주민들이 많이 떠났지만 아직 49가구 85명의 주민이 산다. 우도는 하루의 절반은 섬, 절반은 육지다. 매일 두 번 썰물이 되면 섬과 육지인 고흥군 남양면 사이 갯벌이 열린다.
차량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갯벌에 놓인 도로를 통해 사람들은 섬을 나간다. 하지만 대부분이 고령인 데다 차량도 없는 주민들이 두 번 열리는 물때에 맞춰 육지 병원을 찾는 것은 서울 가는 일만큼 고되다.
박선례 할머니(72)는 “섬을 나가더라도 면 소재지에는 병원이 없어 더 먼 동강이나 벌교읍까지 가야 겨우 의사를 만난다”면서 “물때 맞춰 못 돌아오면 종일 섬 밖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도 사람들이 육지 병원을 찾는 대신 바닷길로 찾아오는 ‘병원선’을 기다리는 이유다.
지난 19일에도 박 할머니는 선착장에 나와 올해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병원선 ‘전남 511호’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날 오전 11시 고흥 녹동항을 출항한 511호는 득량만을 1시간30여분 항해해 낮 12시30분쯤 우도 앞 500m 해상에 도착했다.
병원선이 닻을 내리자 승선원들이 분주하게 8명이 탈수 있는 ‘주민 수송선’을 내리기 시작했다. 선착장에는 이미 주민 2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심과 접안시설 문제 등으로 섬 선착장에 접근하지 못하는 병원선은 해상에 정박한 뒤 작은 보트를 이용해 주민들을 옮겨 태워 진료한다.
며칠 전 병원선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박 할머니는 치과 진료를 미뤄왔다. 임플란트한 치아가 씹을 때마다 불편했다는 할머니는 병원선에 타자마자 진료를 받았다. 치과 공중보건의는 “임플란트 문제라기보다는 잇몸 주변에 염증이 생겼다”며 박 할머니를 치료했다.
의사가 없는 섬 지역을 순회하며 주민들을 진료하는 병원선 511호는 지난 10월16일 23년 된 낡은 선박을 대신해 취항했다. 새로 건조된 390t급 선박으로 길이 49m, 폭 9m 크기다. 최대 항속거리는 1040㎞ 최대 속력은 18노트(시속 33㎞)로 섬 지역 응급환자 발생 시 긴급 이송도 가능하다.
511호는 ‘작은 병원’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선박 1개 층에 내과·한의과·치과 등 3개의 진료실과 방사선실·임상병리실·약제실·진료 대기실 등이 있다. 노인 인구가 많은 섬 주민들의 근골격계질환 치료를 위해 물리치료실도 병원선 중 처음으로 만들었다.
병원선에는 공중보건의 3명과 간호사 등 의료인력 8명과 선박 운항을 위한 승선원 등 모두 17명이 탄다. 511호는 전남 동부지역인 여수와 고흥·완도·보성·강진 지역 섬을 순회하며 진료한다. 출항하면 ‘2박3일’이나 ‘3박4일’ 일정으로 진료하기 때문에 배에 숙소와 식당, 체력 단련실 등도 갖춰져 있다.
우도 해상에 정박한 511호는 곧 ‘병원 응급실’처럼 붐비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한꺼번에 몰렸지만 의료진의 대처는 능숙했다. 간호사와 방사선사, 임상병리사 등은 대부분 5년 이상 장기 근무해 섬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진료 순서를 안내하고 의사 처방을 받아 ‘방사선 촬영’이나 ‘혈액검사’ ‘물리치료’ 등을 진행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관절 통증약이나 감기약·두통약·파스 등을 처방받았다. 주민 23명이 모두 진료를 받기까지는 1시간25분이 걸렸다. 내과 진료가 가장 많았고 치과와 한의과도 각각 15명씩 진료를 받았다. 4명은 혈액검사를 진행했고 3명은 당뇨를 측정했다. 허리와 가슴 통증을 호소한 주민은 병원선에서 곧바로 방사선 촬영을 진행하고 의사의 판독과 상담까지 받았다.
겨울철 자연산 굴 채취를 주로 하는 우도 주민들은 어깨 등 관절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애자씨(65)는 “파스라도 사려면 면 소재지 약국까지 가야 하는데 왕복 택시비만 2만4000원이 든다”면서 “병원선이 오면 돈도 받지 않고 다 해준다. 오늘은 자식보다 낫다”며 웃었다.
김정환 이장(55)은 거동이 불편하거나 다른 일로 병원선을 찾지 못한 다른 주민들에게 전해줄 상비약도 챙겼다. 김 이장은 “이런 섬에서는 의사 한 번 만나기가 쉽지 않다. 병원이 많은 도시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병원선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남에는 동부권 섬을 운항하는 511호 이외에도 목포와 무안·영광·진도·신안·해남 등 서남해 섬을 찾는 ‘전남 512호’ 등 병원선 두 척이 있다. 병원선이 찾아가는 섬은 11개 시군 167곳에 달한다. 보건지소 등의 의료기관이 전혀 없는 섬 135곳과 의사 없이 보건진료소만 있는 섬 32곳에 사는 주민 9173명이 병원선 진료에 의존한다.
올해 들어 지난 1일까지 병원선에서 진료를 받은 전남 주민은 2만232명에 달한다. 방사선 검사 등을 통해 이상 소견이 발견돼 시군 보건소에 통보된 주민만 해도 369명이나 된다. 병원선 진료를 통해 ‘혈액암’ 등 심각한 질병을 발견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섬 지역이 아니라도 농어촌 지역인 전남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의료 취약지다. 전남은 17개 시도 중 유일하게 의과대학이 없다. 전남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1.74명으로 전국 평균(2.18명)보다 한참 낮고 서울(3.47명)의 절반 수준이다. 전국에 상급종합병원이 45곳 있지만 전남은 1곳밖에 없다.
중증·응급환자의 다른 지역 유출률은 48.9%에 달한다. 2021년 기준 다른 지역에서 치료를 받은 전남 주민은 70만명에 이르고 지출한 진료비만도 1조5000억원이나 된다. 전남 주민 1인당 연간 의료비는 242만원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서는 보건소나 공공의료원 등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의사 확보가 어려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전남 공공의료원 3곳에서는 높은 연봉을 제시해도 의사를 구하지 못해 현재 10개 진료과가 휴진 중이다.
공중보건의는 2020년 637명에서 지난해 609명으로 줄었고 올해는 586명으로 더 감소했다. 전남도는 공중보건의를 병원선과 섬 지역 보건지소에 우선 배정하며 버티고 있다. 병원선에서 취약한 의료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젊은 의사들은 이런 실태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공감했다. 공중보건의 A씨는 “지속적인 상담 등을 통해 큰 질환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해서는 의료 소외 지역에도 의사가 필요하다”면서 “도시 병원에 있을 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지역에 의료 인프라가 어느 정도 유지돼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중보건의 B씨는 “병원에 가기 힘든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도시에서는 잘 몰랐다”면서 “병원이 멀리 있다 보니 평소 관리가 안 돼 도시에서는 많지 않은 질환을 앓고 있는 주민들이 많다”고 전했다.
병원선 511호는 지난 22일 여수시 남면 대두라도를 끝으로 올해 순회 진료를 모두 마치고 열흘간의 정비에 들어갔다. 병원선은 2024년 1월2일 여수시 삼산면 광도와 평도를 찾아 새해 첫 진료를 시작한다.
김영록 전남도지사는 “섬 주민에게 최소한의 의료 안전망 역할을 하는 병원선 이용 확대를 위해 적극 지원하겠다”면서 “의료 최대 취약지 전남의 의료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의대가 설립돼야 한다”고 밝혔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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