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소리 플레이어’ 이준석은 어떻게 쓸모를 얻었나

한겨레21 2023. 12. 29.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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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훈의 행재요화]당에서 힘 잃은 전 대표 정치인을 ‘쓴소리 플레이어’로 활용하다 체급만 키워준 언론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2023년 12월27일 서울 노원구 한 식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의힘 탈당과 향후 정치 행보에 대해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힘이 없어야 힘을 얻는 정치인이 있다. 소속 당내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는, 선배 중진 의원과 기득권을 가진 지도부를 향해 쓴소리를 뱉으면서 이름을 알리고 주가를 높이는 정치인이 그렇다. 이들 가운데는 본인 고유의 의제는 거의 없이, 마치 자당을 향해 쓴소리하는 것이 자기 정치의 모든 의제인 것처럼 행동하고 발언하며, 소속 정당의 네트워크 안에서 자당 정치인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당 바깥에서 텔레비전 정치 논평 방송이나 유튜브, 라디오·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당 비판을 아주 가혹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메시지 수신자를 자신이 속한 정당의 지도부나 중진 의원이 아니라 일반인 대중으로 설정해, 정치 쇄신 요구와 기득권 비판이라는 메시지를 관철하기보다 ‘용감하게 눈치 보지 않고 기득권에 저항하며 맞서는 사람’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데 몰두한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 일이 잘 풀리고 지지세를 얻어 기득권을 갖고 지도부에 오르면, 여태껏 대중에게 어필했던 기개와 쇄신의 인상이 무색하게, 그토록 비난해왔던 기득권의 행태와 대동소이한 모습을 보이거나 오히려 훨씬 더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으로 힘을 얻은 뒤 도리어 자신의 그릇과 바닥이 완전히 노출됨으로써 지지를 잃고 힘을 잃게 된다. 비주류에 머물러 있어야만 그나마 자기 목소리가 주류에 닿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하는 ‘쓸모 있는 바보’

이런 역사가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한 정당의 지지자들은 이처럼 자당에서 ‘쓴소리’를 일삼으며 비주류를 자처하고 혁신의 인상을 가져가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의심부터 하고 본다. 시끄럽기만 한 빈 수레로 드러난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내에서 노이즈를 일으키는 식으로, 혹은 이른바 ‘내부 총질’을 하는 식으로 이름을 알린 정치인들은 해당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만 지지하는 정치인에 머무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론사에는 그만한 좋은 기삿거리가 없다. 그의 발언을 보도하는 것만으로도 특정 정파에 유리한 메시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보수매체가 진보 진영 내 쓴소리를 보도함으로써 진보 진영 내부에서 어떤 분열이 일어남을 시사하고 그것이 실재하듯이 가장하고 그에 대한 반발이 있으면 ‘기득권 주류가 비주류를 억압한다’는 식으로 프레임을 짜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부류의 정치인은 반대쪽 정파 성향의 언론매체에 의해 이른바 ‘쓸모 있는 바보’로 이용된다. 내부 인사의 입을 빌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하게 하는, 일종의 복화술 인형으로 갖고 노는 것이다. 해당 정치인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언론이 앞다퉈 자기 발언에 주목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른바 비주류발 쇄신의 기수로 치켜세워지는 인용 보도 세례에 취해 스스로 전국구 정치인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저러한 부류의 정치인에게 한 가지 특성이 더해지면 언론으로부터 더한 관심을 받을 수 있다. 40살 미만의 ‘청년정치인’이라면 그렇다. 젊은 정치인을 넘어 청년세대의 메시지로 과대 포장할 수 있고, 이것에 당내에서 어떤 반발이라도 있으면 ‘청년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억압한다’는 식으로 프레임화하기에 용이하다. 기득권 주류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비주류와 청년이 억눌려 있는 ‘꼰대 정당’이라는 인위적인 인상을 퍼뜨림으로써 정치담론을 제멋대로 왜곡하려는 언론매체에 ‘쓴소리하는 청년정치인’은 정말로 쓸모 있는 바보가 아닐 수 없다. 본인에게도 이렇다 할 의제를 개발할 필요 없이 그저 ‘586 퇴진’만 외치면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인용해주니 더없이 편한 일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식으로 언론과 논단에 의해 ‘청년정치’의 세례를 받고 발언권을 얻은 청년정치인이 셀러브리티로 성장할수록 도리어 자당 지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보수 정치인은 ‘쓸모 있는 바보’로 활용 힘들어

기득권 정치의 ‘카운터(대항) 헤게모니’로서 청년정치의 필요를 외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야기하는 청년정치의 기능은, 지지자와 선배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용기 있게 자당에 쓴소리하는 것에 머무른다. 단지 눈치 보지 않을 용기를 청년정치의 핵심 미덕으로 간주하는 빈약한 상상력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 청년정치인들은 쓴소리 표현의 수위를 지속적으로 높이는 것밖에는 성장세와 영향력을 이어갈 방법이 없다. 자신만의 정치적 의제와 사명은 개발하지 못하고 머리와 에고(자아)만 비대해진 채, 반대 진영의 알리바이만 의도치 않게 설파하고 강화하다가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진보 진영이나 야당에 속한 청년정치인을 보수언론이 적극적으로 띄워주고 인용 보도해주는 데는 정파적 의도가 있다. 그리고 대체로 효과적이다. 자당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는 청년정치인의 목소리만을 ‘청년의 목소리’로 과잉 표상함으로써 야당에 ‘꼰대 기득권’의 인상을 씌우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진보 성향 언론이 보수 진영의 청년정치인을 잔뜩 띄워주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보수언론이 진보 진영의 청년정치인을 복화술 인형으로 이용하며 능숙히 담론을 왜곡하는 것처럼 진보언론 역시 보수 진영의 청년정치인을 모종의 전략적인 패로 활용함으로써 담론 전쟁의 맞불을 놓았다고 봐야 할까? 그리고 그만큼 효과가 있을까? 나는 무척 회의적이다.

보수 진영의 정치인은 쓸모 있는 바보로, 복화술 인형으로 활용하기 힘들다. 오히려 진보언론이 그 정치인의 체급을 키워주는 꼴을 면하기 어렵다. 그 이유를 ‘진보주의는 가치지향적, 보수주의는 이익지향적’이라는 강준만 교수의 통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 진영에서 한 젊은 정치인이 내부 총질로 주목받고 주가를 올리면, 그 이후를 고민하지 않으면 쉽게 버려지고 잊힐 수 있다. 본인의 의제를 벼리고 지향하는 가치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으면 지지세가 쉽게 와해하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 진영에서 비슷한 사례의 정치인이 있다고 한다면, 한번 형성된 지지세는 그렇게 쉽게 와해할 수 없다. 어떤 뚜렷한 가치지향점을 제시할 필요 없이,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향한 증오를 강하게 표시하면 그 증오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결집한다. 결국 진보언론이 전략적인 패로 활용하려는 의도로 보수 진영의 청년정치인을 띄워준다면, 전략적으로 활용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구심점이 되는 새로운 헤게모니적 블록을 만들어줄 수 있다.

이준석 체급만 높여주는 결과로

<한겨레> <경향신문> 등 진보 성향 언론이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그토록 띄워주는 것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당사자들은 ‘띄워준 게 아니다’라며 억울함을 표시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필요 이상으로 그의 발언에 주목함으로써 띄워준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보수 진영의 분열을 획책하려는 건지, 자기들 나름대로 그를 ‘쓸모 있는 바보’로 써먹을 수 있다고 믿는지 모르겠지만 그만했으면 좋겠다. 전혀 효과도 없고 부작용만 가득하다.

이를테면 천관율 기자는 토론 플랫폼 ‘얼룩소’에 쓴 ‘이준석은 어쩌다 거물이 되었나’라는 글에서 이준석이 자기 이름으로 당을 만들겠다는 선언이 어색하지 않은 체급이 이미 됐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는 이준석 전 대표가 대통령과 지도부 등 현 권력집단과 갈등을 빚고 소음을 일으키면서 지속적으로 뉴스에 올랐고, 그 과정에서 보수 진영을 재구성할 새로운 연합 집단을 스스로 발굴해냈다는 점을 꼽았다. 여기서 천관율 기자가 말하는 새로운 연합의 파트너는 ‘청년 남성’이다. 이른바 집게손가락 억지 논란을 위시한 반페미니즘에 편승하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에 비아냥대는 것만으로 ‘청년 남성을 위한 정치’를 참칭하는 자를 갖다가 ‘새로운 연합을 구성했다’고 평가하면, 그가 자의적으로 표상하는 ‘청년 남성’이란 집단이 실체가 있는 헤게모니 블록이 돼버린다. 이것의 위험성을 알았다면 ‘거물’이란 허황된 단어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우석훈 교수는 <주간경향> 좌담회에서, 어떤 조건을 걸긴 했지만 이준석이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명실상부한 논객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해야 하는 발언이다. 그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좋게 해석하자면, 그토록 해로운 정치를 하는 사람이 주목을 독점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왜곡된 정치 지형에 경고의 일침을 날린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특정 정치인의 위험성을 부각하는 데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정치인에게 위험하다는 인상은 양날의 칼일 수 있는데, 힘을 맹신하며 능력주의의 한 측면만을 사회 논리라고 여기는 정치인과 그 지지자들에게 ‘위험하다’는 꼬리표는 명예로운 훈장과 다르지 않다. 어떤 정치인의 사상이나 발언이 위험함을 지적하려면 그것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짚고 비판하되 해당 정치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최소화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고 위험한 정치인, 경계해야 할 정치인이라고 하면 결과적으로 그의 체급만 높여주게 된다.

‘위험하다’는 꼬리표는 명예로운 훈장

<주간경향>은 ‘민주당판 이준석 왜 없는 걸까’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를 냈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다. 이준석 같은 정치인은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된다. ‘민주당판 이준석’이 없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겨레21>의 한 칼럼은 이준석 신당에 큰 기대감을 표했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라면 공연한 훈수질은 삼가자”라는 도대체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은 차치하고, 오직 무언가에 대한 증오를 표시하는 것만으로 지지세를 얻은 자의 시끄러운 준동을 숨 막히는 양당체제에 뚫어준 숨구멍에 비유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을 방증한다고 생각한다.

김내훈 칼럼니스트

*행재요화: 다각적으로 정치·사회·문화 담론을 비평하는 칼럼입니다. ‘행재요화’는 남의 불행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놀부심보’를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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