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환의 진화의 창] 왜 점을 믿는가?
연말연시에는 사주나 타로로 새해 운세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 점집을 직접 방문하거나 유튜브, 스마트폰 앱, 온라인 상담 서비스 등으로 길흉화복을 점친다. 미신을 믿는 이로 보일까 염려해서인지 대다수 사람은 ‘재미 삼아’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함이라고 보호막을 친다.
사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별자리로 점을 치는 점성술은 말도 안 된다며 비판한 바 있다. 도킨스는 저서 <무지개를 풀며>에서 미국의 어떤 작가가 한 신문사에 가짜 점성술사로 근무했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 작가는 오래된 점성술 잡지에 있는 글들을 가위로 잘라내서 모자 안에 넣고 섞었다. 그리고 글 12개를 임의로 뽑아서 모은 다음에, 마치 점성술사가 쓴 것처럼 ‘별자리 운세’ 칼럼을 신문에 매주 연재했다. 그 점성술 칼럼은 독자들의 앞일을 족집게같이 맞힌다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나는 대학원생 때 이 일화를 읽은 이후로 지금껏 사주나 타로와 담을 쌓은 채 살고 있다.
사주팔자, 타로, 점성술, 관상 등은 엉터리다. 솔직히 대학교 축제에서도 타로 상담 부스에 학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선 모습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왜 예외적인 방법을 통해서 앞일이나 감추어진 진실을 알아내는 점복(占卜)은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할까? 연인들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읊조리며 꽃잎을 한 장씩 떼어서 사랑점을 친다. 신령은 무당의 육신에 일시적으로 강림하여 근엄하게 신탁을 내린다. 쌀알이 소반에 어떻게 흩어졌는지, 불에 구운 거북 등딱지가 어디로 갈라졌는지, 닭의 내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카드 더미에서 아무거나 뽑은 카드가 무엇인지를 보고 점술가는 전쟁의 승패, 국가의 미래, 취업과 진로, 연애와 결혼을 점친다. 왜 사람들은 점치는 행위를 대단히 신뢰할까?
진화심리학자 파스칼 보이어는 2020년 논문에서 남들과 의사소통할 때 사기를 당하지 않으면서 유용한 정보를 얻게끔 정교하게 진화한 인간의 마음에 해답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기꾼의 번지르르한 언설에 매번 홀랑 속아 넘어갔던 조상은 자식을 남기지 못했다. 우리는 누군가 내게 어떤 말을 했다면 그가 그렇게 말한 의도는 무엇인지, 그 말이 이치에 맞는지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던 조상의 직계 후손들이다. 이를테면, 병을 앓는 여성에게 옆집 총각이 찾아와서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나와 동침하면 병이 나을 거야.” 물론 여성은 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진술의 참·거짓은 그 말을 한 사람의 의도에도 어느 정도 달려 있다고 판단하게끔 진화했기 때문이다.
이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점술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성에 주목해 보자. 점괘에 담기는 구체적 정보는 점술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즉, 점술가는 점괘를 전달할 뿐, 점괘를 만든 당사자가 아니다. 점술가나 의뢰인은 점괘가 내리는 진단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모든 과정이 꼼꼼하게 이루어진다. 타로는 잘 섞인 다음에 뒤집혀서 깔리기 때문에 누구도 어느 카드가 나올지 알 수 없다. 쌀알은 소반에 확 뿌려지기 때문에 누구도 어떤 모양이 나올지 알 수 없다. 닭은 배를 가르기 전에는 누구도 내장이 어떻게 생겼을지 알 수 없다. 신령에 빙의된 무당은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내서 신탁이 무당의 말이 아님을 암시한다.
이처럼 점괘에 점술가의 의도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면, 의뢰인으로서는 점괘의 진실성을 의심할 이유가 하나 줄어들게 된다. 아픈 여성이 무당에게 쌀점을 의뢰했더니 “옆집 총각과 동침하면 병이 나으리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하자. 점괘를 바로 거부하기가 살짝 껄끄러울 것이다. 보이어는 사람들이 점술이 진실을 알려준다고 믿는 정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임을 강조한다. 취업, 연애, 결혼, 이사, 이직 등 중요한 문제가 닥쳤을 때 (1) 점괘가 내리는 진단과 (2) 불확실한 추측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점술을 더 믿는다는 것이다. 짝사랑하는 상대가 날 사랑하는지 알아낼 방법이 전혀 없다면 꽃잎을 하나씩 뜯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대의 SNS 부계정에서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사랑점은 보지 않아도 된다.
요컨대 점술가는 점괘와 전혀 무관함을 명토 박음으로써 점술은 그 진단이 누군가의 음침한 의도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신뢰성을 대중으로부터 확보한다. 보이어의 가설은 적지 않은 종교인이 “아이고, 흉해라. 무슨 교인이 점집이야~”라고 하면서 점집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현상을 잘 설명해 준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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