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어떤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기자 2023. 12. 2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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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옛날 ‘상고시대’를 상상하여 구현한 드라마 <아라문의 검>은 최초의 국가 ‘아스달’을 통해 문명과 인간의 길을 묻는다. 이방인과 소수자를 혐오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문명,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약탈적 전쟁, 공포와 불안을 이용하는 정치와 종교 등 드라마가 보여준 세계는 ‘오늘’이 품고 있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행히도 ‘예언의 아이들’이 나타나 거대한 문명과 맞서 싸워 승리하여 폭력과 공포, 차별과 착취의 세계를 끝내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며 드라마는 끝난다. 그 결말은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란 갈등과 저항, 퇴행과 진보가 뒤숭숭하게 엮인 이야기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세계는 그런 이야기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앞으로 쓸 이야기의 첫 페이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원하는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까?

드라마는 각 인물 간의 적절한 갈등과 어느 정도의 자극적 상황이 배치될수록 좋은 이야기로 인정받기 마련이다. 현실은 반대다. 별일 없이 사는 게 최고다. 개운한 마음으로 눈뜰 수 있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지 않게 있으며, 적절한 온도의 호의를 주고받을 이들이 곁에 있고, 건강한 긴장감으로 인해 생활의 탄력이 유지되는,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외로움과 깨끗한 보람 속에 별다른 죄책감이나 내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잠들 수 있는 일상. 이게 드라마라면 지루해서 금세 화면을 꺼버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심심한 이야기를 원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이런 이야기 속에서 살면 좋겠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 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지독할 때가 많다. 그 현실 속에서 우리는 쉽게 분노하고, 필요 이상으로 절망하며, 그런 분노와 절망을 외면하기 위한 자극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그리고 그 자극은 결국 누군가를 사회로부터 밀어내거나 죽음으로 내모는 연료가 된다. ‘막장 드라마’가 별건가. 그래서 나는 종종 ‘세상이 빨리 망했으면’ 하고 기도한다. 오늘도 세상은 망하지도 않고 그저 망가진 채로 굴러가지만.

이런 각박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세상이 망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폭력과 공포, 차별과 착취적 세계관에 저항하며 애써 다른 이야기를 발견하고 이어가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게다. 환대와 애정에 헌신하며 서로를 돌보고자 애쓰는 이들이 우리의 일상과 세계를 힘겹게 떠받들고 있으며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빚지며 하루를 살며 내일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애써 주목하고 싶(었)다. 지난 5년 동안 이 지면에 보낸 이야기들은 그런 ‘애씀’의 기록이다. 물론 나의 생각이 비현실적인 낭만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죽이는 이야기의 속도감에 압도된 세상이라면, 차라리 더 적극적으로 낭만의 브레이크를 걸고 멈춰 서서 시선을 돌려 위태롭게 흩어진 이들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에 내 조그만 힘을 보태고 싶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그러면 좋겠다. 이 작고도 넓은 지면에서 나눈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2024년에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가 필요한지 고민하며 ‘좋은 이야기’ 속에서 서로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드라마의 말들> 저자

오수경 자유기고가 <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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