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하지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해방의 문체라는 건[신새벽의 문체 탐구]
마이너 필링스
캐시 박 홍 지음 | 노시내 옮김
마티 | 276쪽 | 1만7000원
“나는 서울에서 못 산다. 그곳은 여자들이 살기 좋은 곳이 못 된다.” 미국에 사는 저자가 이렇게 썼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한국 여자인 나는 이 문장에서 벽을 느꼈다. 아아, 그렇군요. 공감되기는 하는데…….
<마이너 필링스>는 197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시 편집자, 문학 교수 캐시 박 홍이 인종주의가 초래하는 감정들에 관해 쓴 책이다. 2020년 영어로 출간된 책을 번역가 노시내가 무척 자연스럽고 힘있게 옮겼다. 애초에 한국어로 쓴 책처럼 보일라치면 ‘명미 킴’ ‘영진 리’와 같은 미국식 이름 표기가 나와서 생경하게 한다.
캐시 박 홍은 시집 <몸을 번역하기> <댄스 댄스 레볼루션>으로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다. 홍보 행사인 시 낭독회를 하면 청중 대부분이 백인이고 혼자 얼굴색이 다른 그는 마이너였다. 우울증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생각한다. ‘내가 지금 누굴 위해 글을 쓰는 거지?’ 주변 사람들은 “네 얘기를 써”라고 말해왔지만, 그런 뻔한 요구를 물리친 지 오랜 시간이 흘러 그는 결국 아시아인으로서 쓴다.
마이너 필링스란 일상에서 받은 차별에 관해 ‘그게 그 정도는 아닌데?’라고 평가절하를 받을 때 생기는 소수적 감정이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험에 이름을 부여한 이 책은 팬데믹 시기를 지나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아마존 문학비평·예술 분야 1위에 등극했다.
비소설이자 회고록, 에세이인 책은 글을 쓰는 게 어렵다는 감정을 노출시킨다.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며 자꾸 회의하게 된다. 무엇을 넣지? 무엇을 빼지?” “엄마 얘기는 일단 미루자.” 인종차별을 뻔하게 말하는 형식들은 익히 알고 있다는 인식을 노출시킨다. “고백적 서정시의 형식은 내 인생이 그렇게 비범하지 않은데 나의 아픔만 특별하고, 이례적이고, 극적인 느낌이 들어서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문체의 측면에서 볼 때 말하듯이 쓰기, 풍부한 직접인용, 강렬한 가족과 친구 스토리텔링까지 다양한 기술을 유감없이 구사하는 책이다. 마티 출판사에서 ‘자기 이론적 시도’인 앳(at) 시리즈의 첫 번째 주자로 내세운 타이틀에 한국 독자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를 읽는 나의 유감은 하나다. 공감되는 구절이 뻔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뿌리는 이 나라가 우리에게 부여한 기회가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의 자본주의적 확장이 우리의 조국의 피를 빨아 부를 챙긴 방식이다.”
캐시 박 홍은 먼 길을 돌아와 자기 이야기라는 부름에 응답하는데, 그 결과로 ‘우리’에 대해 말하는 구간이 뻔해진다. 이건 읽는 사람의 평가일 따름이니, 나의 심드렁한 느낌은 출판편집자로 일하며 지친 나의 마이너 필링스라 하겠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이 내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탐탁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이기 때문에 좋은 점을 찾아보는 상황이다.
좋은 점은 분명하다. 캐시 박 홍은 강하고 예리하다. 흑인 스탠딩코미디언 리처드 프라이머가 흑인 여자와 백인 여자를 비교할 때 얼굴을 찌푸리다가도, 그의 얼굴에 서린 자기혐오를 감득한다. 한국계 미국 작가인 테레사 학경 차가 몸을 희생하는 여성들에게 매료되었다고 지적하다가도, 그건 또한 자신을 혁명에 내맡긴 여성들에게 매료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독자는 ‘마이너 필링스’ 외에도 많은 언어를 얻는다. 테레사 학경 차의 문체가 “꼭 즐겁지는 않더라도 해방감을 준다”는 표현은 캐시 박 홍을 읽는 나도 따라 쓰고 싶다. “보편적인 것은 백인성이 아니라 우리의 차단된 상태”라는 진단은 고립된 취약한 존재들이 말문을 열게 돕는다.
이 책에서 즐겁지 않다고 느껴지는 점은 성공하는 에세이의 필수요건 같다. 자기 얘기를 적당히 하지 않고 길게 하기, 반증 가능한 주장을 펼치기보다 반박 불가인 윤리에 호소하기. <마이너 필링스>처럼 잘 쓰인 인문서는 드문데 나는 무얼 바라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에세이 성공 법칙과는 반대로 자기 얘기는 약간만 하고, 모종의 주장을 펼치는 인문서는 만들어봤지만 덜 팔렸다.
좋은 인문서들은 내용이 같다. 모두 해방에 대해 말한다. 책마다 다른 것은 형식이므로 문체 탐구의 목적은 앞으로 또 다른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한 스타일 분석이다. 일년 동안의 탐구에서 내가 알게 된 건 지금 인문사회 출판에서 자기 이야기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데, 글이 뻔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만이 아니라 ‘이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너무 긴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끝에도 상쾌하게 헤어지는 방법은 하나의 대책을 공유하는 일이듯이 말이다.
“우리는 이 나라에 늘 있었던 존재다”라는 마지막 선언과 함께, ‘자본주의’가 뭐하는 자본주의인지, ‘조국’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새해에는 그런 대책이 있는 책을 만들어야겠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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