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시각] 새해에는 삶을 더 아쉬워하기를
어린 시절 다시 살아가는듯 해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 알길
아내는 원래 자신이 동심을 잃지 않은 편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아이와 함께하면서 그 생각이 처절히 무너졌다고 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를 보면서, 어른이 아무리 동심을 잃지 않는다 한들 진짜 동심에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와 함께 살면서, 나 또한 마치 전혀 몰랐던, 이전에 가본 적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아이의 시선으로 보면, 내 삶의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길가에 떨어진 은행잎은 가오리를 닮았고, 그래서 갑자기 도로는 바다가 된다. 아이의 손을 잡고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잽싸게 하얀 선으로 올라간다. 하얀 선을 섬이라 정했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했던 집 앞 도로조차 환상의 바다가 된다.
지난 몇십 년간, 아마도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담벼락의 틈에서 달팽이를 발견한다. 알고 보니, 주위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달팽이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 온 뒤 거리에서 지렁이 탈출 작전을 감행해서, 아스팔트에서 괴로워하는 지렁이들을 흙으로 되돌려준다.
목욕 시간은 내게 하루에 쌓인 피로를 잠깐 씻어주는 시간에 불과하지만, 아이에게는 신나는 마법의 약을 만드는 시간이다. 아이는 내가 씻는 동안, 옆에서 물통에 샴푸와 비누와 물 등을 섞어서 마법의 약을 만든다. 뿌옇게 변한 거울은 신기한 그림판이 되고, 거품들은 악당이 된다. 삶이 환상에 물든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우리는 집 안 곳곳을 부지런히 꾸몄다. 아이는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트리에 걸고, 우리는 하루하루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어떻게 산타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올지 이야기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아이의 고모부가 산타로 변장에서 베란다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저 화려한 네온사인이나 구경하고 값비싼 음식이나 소비하고 끝났을지 모를 크리스마스가, 진심 어린 환상의 시간으로 변모했다.
나는 아이가 생긴 덕분에, 아이와 함께 적극적으로 세계를 만드려는 의지로 가득 찬다. 이를테면, 우리는 놀이 만들기를 좋아한다. 얼마 전에는 900원에 20개쯤 들어 있는 딱지 세트를 하나 사서, 며칠 내내 그것만 갖고 놀고 있다. 딱지로 '알까기' 놀이 규칙을 만들어 경쟁하니, 세상 그 어떤 키즈카페나 비싼 장난감 놀이보다 재밌어서, 아이와 나랑 둘 다 이 놀이에 빠져 있다. 몇 년 전부터 아이와 함께 만들고 있는 그림책은 벌써 20편이 다 되어간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갈 때, 아내는 "아이는 우리에게 잠시 왔다 가는 귀한 손님이야" 하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절절히 공감했다. 아이는 불과 1년 전과 비교해도 부쩍 자라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에 지나다니는 포크레인만 보면 신기해하던 아이가 공룡에 관심을 가지더니, 이제는 포켓몬스터에 빠져 있다. 말도 하고 한글도 곧잘 읽는다. 우리는 매일 오늘보다 더 작았고 더 어렸던 어제의 아이와 이별하고 있다.
삶에 전례 없이 소중한 한 존재가 눈앞에 있고, 그 아이를 매일 사랑하며, 매일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이 마음이 묘하다. 그런데 그 마음으로부터 바로 삶을 배운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란, 원래 이토록 부단히도 흘렀던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그리고 우리 곁의 소중한 사람과 함께할 시간은 매일 줄어들고 있다. 다만, 아이가 무섭게 크면서 그 진실을 눈앞에서 체감할 뿐이다.
아이가 우리 곁에 오면서, 그 어린 시절을 다시 한번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한 세계가 우리에게 왔고, 우리는 그 세계에 충실하고 있다. 마치 언젠가 떠날 삶에 충실하듯, 이 사랑과 이 시절에 충실하고자 한다. 새해에는 작년보다 내가 더 이 나날들의 소중함을 잘 알기를, 조금 더 오늘을 아쉬워할 줄 알기를, 보다 더 삶을 사랑할 줄 알기를 바라본다.
[정지우 문화평론가·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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