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의 꿈 '천만'… 마동석 6번, 황정민 3번 이뤘다
한국 사회에서 '천만(千萬)'이란 단어는 의미가 남다르다. 천만표가 모이면 대통령도 바뀐다. 김영삼(997만표)·김대중 전 대통령(1032만표)은 천만 득표로 당선됐다. 박근혜(1577만표)·문재인(1342만표)·윤석열(1639만표) 정부가 들어서며 당선권 득표수는 천만을 훌쩍 넘겼지만 '천만이 모이면 세상이 바뀐다'는 정치사회적 의미는 여전하다.
그런데 천만이란 단어 사용이 가장 빈번한 곳은 정치 현장이 아닌 영화계다. 천만은 모든 영화인에게 꿈같은 이데아(idea)다. 영화 티켓 한 장이 1만5000원인 시대에 누적 관객 천만명이면 매출액 1500억원인데, 천만 영화는 값으로만 따질 수 없는 하나의 문화적 사건으로까지 격상된다.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 고지에 안착한 데 이어 1100만 관객까지 넘어서면서 대한민국 천만 배우 지형도가 다시 바뀌었다. 2003년 한국 최초의 천만 영화 '실미도' 이후, 2023년은 한국에 '천만 영화'란 게 생긴 지 20년 되는 해였다. 20년간 천만 영화에 출연한 '천만 주·조연 배우'의 얼굴들을 되짚어봤다.
딸 바보·치킨집 사장 … 멀고 먼 '천만'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 역을 맡아 천만 고지를 또 한 번 점령한 황정민은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의 빛나는 별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최정상 배우 타이틀과 달리 황정민의 천만 영화는 예상 외로 많지 않았고, 이번이 세 번째다. 부산 국제시장 잡화점 '꽃분이네'를 지키던 덕수의 한 생을 이야기한 '국제시장', 트럭운전자 자살 사건을 수사하던 서도철 형사가 집념 끝에 재벌 3세를 잡는 이야기를 담은 '베테랑'이 그것이었다. 황정민도 '서울의 봄'으로 천만 영화 3편을 보유하게 됐다. 황정민은 내년 '베테랑2' '크로스',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 '호프' 개봉을 앞뒀다. 황정민의 '네 번째 천만'은 가능할까.
주·조연을 넘나든 최고의 티켓 파워 배우는 마동석이다. 마동석의 '공식' 천만 영화는 무려 6편. 마동석은 '부산행'에서 최강 전투력으로 좀비의 면상을 박살 내는 윤상화 역으로 처음 천만 배우의 꿈을 이뤘다. 맞는 악인이 불쌍해 보이는 그의 핵주먹은 관객에게 대리만족을 허락했다. '신과 함께-죄와 벌' '신과 함께-인과 연'에서 정직과 신념을 가진 성주신 역으로 활약한 마동석은 '범죄도시2' '범죄도시3'로 연타석 만루홈런을 날리며 승승장구 중이다. 여기까지가 5편. 또 한 편의 마동석이 출연한 천만 영화가 있으니 바로 '베테랑'이다. 그는 '아트박스 사장' 역으로 우정출연(카메오)해 천만 필모그래피를 채워 넣었다. 다만 주연작 천만 영화 5편 중 4편이 시리즈물이어서 '캐릭터의 다양화'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출연 때마다 색깔이 다른 배역을 소화하며 오직 '주인공'으로만 천만 필모그래피를 쌓은 배우는 류승룡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 '명량' '극한직업' 등 4편에서 배우 류승룡은 전부 주연이었는데, 그의 천만 영화 캐릭터는 단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광해군 8년, 박충서의 독살을 우려해 임금 대역으로 '가짜 왕'을 모시는 도승지 허균, 7세 지능을 가진 2급 장애 마트요원으로 누명을 써 수감된 딸바보 용구, 해체 위기에 처한 마약반을 구하려다 '치킨 맛집' 수원왕갈비통닭을 창업하는 고 반장, 충무공을 처단하려는 왜군 선봉장 구루시마 등 류승룡은 입체적인 연기로 팬들 성원에 보답했다.
저 영화가 전부 천만 고지 넘겼더라면
한국 최고 배우 송강호의 천만 필모그래피도 총천연색이다. '괴물' '변호인' '택시운전사' '기생충'에서 전부 주연을 맡았고, 이로써 천만 고지를 4회나 넘었다. 배우 송강호는 꾸준히 영화 촬영에 임하면서도 과거 캐릭터를 스크린 안에 재소환하지 않고 하나씩 축적하는데, 지능적으론 뒤떨어지지만 딸을 구하려는 마음만은 일등인 소시민('괴물')부터 불의의 질서를 논리적으로 따박따박 반박하는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변호사('변호인')까지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 연기 내공은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깊어 보인다.
이제 한국이란 무대가 좁아 보이는 배우 이정재가 출연한 천만 영화도 4편이다. 하지만 '신과 함께' 시리즈편에서 이정재의 배역은 염라대왕이었고, 이로써 인상적인 연기를 남겼지만 그는 명백하게도 주연급은 아니었다. 이정재가 주연을 맡았던 천만 영화는 '도둑들'과 '암살'이었다. 주로 이정재가 야비한 연기를 스크린에서 보여줄 때 관객들은 '특히' 환호했다. 마카오 박에게 악감정을 가진 '지질남' 뽀빠이, 독립운동가에서 친일로 변절한 두 얼굴의 염석진에 관객들은 호응했다. 하지만 이정재의 천만 영화가 '고작' 2편이라 한들, 그의 필모그래피가 빈약하다고 평가할 이가 있을까. 한국영화 '천만'의 기준으로 배우 이정재를 평가하기엔 그는 이제 너무 깊어졌고 또 넓어졌다.
하정우 역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천만 배우다. 출연작은 3편이다. 300달러만 주면 누구든지 죽여주는 하와이 피스톨 역을 맡은 '암살'로 천만 영화 고지를 처음 달성했고, '신과 함께' 시리즈에서 저승 삼차사의 리더 강림도령으로 두 번의 천만 고지를 더 넘었다. 다만 하정우에겐 천만 영화의 관점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을 법한 영화가 다른 배우들보다 눈에 띄게 많은 편이다. '국가대표'(849만명), '베를린'(716만명), '터널'(712만명), '1987'(723만명), '백두산'(825만명) 등이 천만 고지에 근접할 수 있던 작품들이었다. 여기에 '추격자'(507만명),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472만명), '더 테러 라이브'(558만명), '아가씨'(428만명)도 빼놓을 수 없는 흥행 성공작이다.
'악역'만으로 4편의 천만 영화를
작품마다 주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조연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만큼 강한 인상을 남기는 명배우는 유해진이 아닐까. '왕의 남자' '베테랑' '택시운전사'를 통해 그는 조연급 배우에서 주연급 정상 배우로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천만 영화에 3편 이상 출연한 배우로는 예수정, 정진영, 김해숙, 이경영, 이정은, 임원희, 최덕문, 김명곤, 장광, 김민재, 정만식, 최귀화 등의 귀한 이름이 확인되는데, 극의 감칠맛을 돋우는 '신스틸러' 조연들을 전수조사하면 이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저 수많은 조연 중에서도 유독 빌런(악역)으로만 무려 4편의 천만 관객을 달성한 독보적인 '악역 전문' 배우가 있다. '서울의 봄'에서 국방부 장관 오국상을 연기한 배우 김의성이다. 김의성의 능청스러우면서도 서늘한 '악당' 연기의 비책은 관객 혈압을 급상승시키고 결국 뇌리에 콕 박히게 하는 대사의 맛 때문일 것이다. "죄송합니다, 마님. 잠시 눈을 좀 감아주십시오"(강인국의 집사로 나온 '암살'), "뭐해? 빨리 출발시키지 않고"(천리마고속 상무로 나온 '부산행')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서울의 봄'에서 김의성은 오국상 장관이 되어 또 한번 분노 유발 대사를 남겼다. "아니, 장관이 육본 지키는 사람이야?"
올해 혁혁한 공을 세운 천만 배우로는 이준혁을 빼놓을 수 없다. 2023년 천만 영화는 '범죄도시3' '서울의 봄' 2편으로, 배우 이준혁은 두 영화에 동시에 출연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준혁은 '범죄도시3'에선 야쿠자와 손잡고 마약을 밀수하는 경찰 주성철 역으로 열연했고, '서울의 봄'에선 육군참모총장 경호장교 권형진 역으로 특별출연했다. 권형진 배역은 비중이 작지만, 그도 엄연히 천만 영화의 공신이다. 앞서 이준혁은 '신과 함께' 시리즈물 2편에서 악역 박무신 중위 역을 맡았다. 이미 천만 영화 2편에 출연했으니 이준혁의 천만 영화는 이제 4편이 됐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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