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색깔을 드러내라
이념·정책보다 친소관계로 격돌
유권자 위해 정체성 분명히 해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의 계파 싸움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임명을 두고 당내 비주류 의원들이 반발했고, 윤석열 대통령과 대립한 이준석 전 대표는 탈당해 신당 창당 작업에 돌입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일부 비주류 의원들이 이재명 대표의 사퇴를 요구한 상황이고, 이낙연 전 대표는 당을 떠날 가능성이 높다.
양당이 친윤(친윤석열)과 비윤, 친명(친이재명)과 비명으로 무리 지어 싸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 투쟁이고, 첫 단계가 총선 공천을 따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당 소속이 맞나 의아할 정도로 격렬한 상호 비방, 독설이 난무하는 내전 수준의 계파 싸움이 한창이다. 그런데 정작 유권자들은 각 계파의 차이점이 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윤 대통령이 “제일 중요한 건 이념”이라고 했는데, 친윤과 비윤에 이념적 차이가 있을까. 추구하는 정책 방향이 다르기라도 한 건가. 친명과 비명이 싸우는 이유는 정치 노선이 달라서일까. 경제 문제에 대한 시각차가 조금이라도 있는 건가.
과거 친문(친문재인)과 비문, 친박(친박근혜)과 친이(친이명박) 등 극심하게 대립했던 계파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공유하는 정치적 가치와 철학에 따라 계파가 형성되는 게 아니라 대통령·대선후보 등 특정 정치인과 ‘얼마나 친하냐’로 편을 가른다. 당권과 공천을 둘러싼 밥그릇 싸움 외에 이들이 국정 방향과 정책을 놓고 치열하게 격돌하는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싼 친이-친박의 논쟁,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한 유승민계의 비판 정도가 기억날 뿐이다.
그러나 모든 계파가 그랬던 건 아니다. 해방 직후부터 유력 정치인을 중심으로 여러 계파가 만들어졌는데 분단 상황과 민족주의, 공산주의 등에 대한 입장과 생각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대표적인 정치 계파로 거론되는 동교동계(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세력)와 상도동계(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세력)는 두 정치 지도자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출신 지역을 바탕으로 형성돼 민주화 투쟁을 한 공통점이 있으나, 상대적으로 강경-온건한 노선 차이는 존재했다.
뚜렷한 이념·노선·정책적 차이가 없는 건 계파뿐 아니라 정당들도 비슷하다. 정치학자인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의 정당정치는 이념적 분화가 거의 없으며 여당일 때는 여당스럽기만 하고 야당일 때는 야당스럽기만 해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예로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통과된 테러방지법을 거론했다. 당시 여당(현 국민의힘)이 법안을 밀어붙이자 야당(현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된다며 법 제정에 반대해 무려 9일간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벌였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민주당은 여당이자 다수당이 됐는데도 법을 바꾸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부 의원들은 법을 강화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계파 역시 주류일 때 주류스럽기만 한 게 문제다. 주류가 당권과 공천권을 독점하면, 비주류는 당내 민주화를 요구하며 ‘공천학살’이라 반발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똑같은 일을 벌인다. 친이와 친박이 그랬고, 친문과 친명도 마찬가지였다.
이념·노선이 아닌 개인적 친소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계파는 리더에 맹종할 수밖에 없다. 현재 양당이 직면한 '수직적 당정관계' '당 대표의 사당화' 문제가 그 부작용이다.
특정 인물과의 친소관계를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계파·정당을 유권자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최소한의 정치적 색깔·이념만큼은 드러내길 바란다. 저잣거리 패싸움이 아닌 진정한 정치 투쟁을 보고 싶다.
한준규 뉴스2부문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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