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만큼은 정치 입김 최소화해야”[만나고 싶었습니다](2)
2023. 12. 29. 16:02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는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위원들이 중심이 되는 합의제 의사결정기구로 미술, 공연, 문학 등 기초예술 분야를 지원한다. 2023년 1월 제8대 예술위 위원장으로 국회의원 5선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정병국 위원장이 선출됐다. 민간합의기구인 예술위에 정치인 출신 위원장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문체부 산하기관인 예술위는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논란의 한복판에 있었던 만큼 우려의 목소리는 높았다. 정 위원장은 그러한 논란에 대해 “동의하는 바다. 위원장직에 지원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내가 가야 할 자리가 아니고 정치인이 해야 할 자리는 아니다고 분명하게 거절했던 이유”라고 말했다. 주변의 권유가 계속됐다. 예술위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부의 영향력에 좌우되는 만큼 오랜 정치를 했고, 예술위의 역할에 대해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는 인물이 나서서 외풍을 막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정 위원장은 “블랙리스트 사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며 “예술위가 정치권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구조적 개선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21일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집에서 만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정치인이 위원장으로 취임한 것은 처음이다. 5선 의원, 전직 문화부 장관이 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는데….
“국회에 있을 때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민간합의기구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바꾸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문화예술만큼은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더라도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위상이 어떠해야 하고, 또 어떤 분들이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위원장직에 지원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내가 가야 할 자리가 아니고, 정치인이 해야 할 자리는 더욱 아니라고 분명하게 거절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예술인이 찾아와 위원회 운영의 어려운 현실을 토로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또 문화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외부의 입김, 바람을 타게 된다는 하소연이었다. 정치도 해보고 문화부 장관도 지냈고, 또 예술위의 구조를 바꿀 만큼 의지도 있으니 위원장으로 와서 외풍도 막아주고 예술위 본연의 위상을 세워주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되돌아보니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지원하게 됐고, 위원장으로 호선됐다. 처음에는 ‘정치인이 웬 말이냐’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지난 1년간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의견을 수렴해 지원시스템을 바꾸는 등 소통을 이어가면서 그러한 오해가 많이 없어졌다. 오히려 지금은 기대감이 높아져 중압감이 느낀다.”
-예술위는 한국의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책임지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흑역사도 있다. 취임 당시 ‘예술인들이 정치권에 눈치 보지 않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이를 위한 어떤 구상이 있나.
“블랙리스트 사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문제를 근절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예술위 실무진들이 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는 전담심의관제 도입을 추진 중이다. 각 분야의 전담심의관들이 지원사업을 심의·선정하고, 이후 해당 사업에 대한 모니터링과 결과 평가까지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다. 예술위가 단순히 문화부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전담심의관이 전문성을 토대로 자신의 직을 걸고 심의를 하게 되면 심의에 중심이 잡히면서 블랙리스트 같은 정치권의 외압에 휘둘릴 여지가 사라질 것이다. 현장에서도 심의에 대한 신뢰가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권위가 서리라고 본다.”
-취임 후 1년이 지났다. 가장 보람된 일을 꼽는다면 무엇이었나.
“내부적으로 지난 10년간 정체돼 있던 지원금 심사제도를 바꿨다. 그동안 해오지 않았던 현장 업무 보고도 14차례 열어 사업관계자와 예술현장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를 토대로 사업구조를 전면 개편했다. 대표적으로 44가지로 나열돼 있던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을 17개로 단순화했다. 이를 통해 창작자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혔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높아진 문화예술 위상에 걸맞은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다. 2025년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이 건설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비엔날레는 격년제로 열리기 때문에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30주년 기념 특별전을 개최하기로 했다. 또 2023년 5월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린 국제예술위원회 문화기관 연합(IFACCA) 지도자 회의 및 제9차 문화예술세계총회에 참석했다. 3년마다 개최하는 회의인데, 그 자리에서 다음 총회는 한국에서 유치하겠다고 제안했다. 기술 발달로 인한 기술격차, 정보격차 문제가 심각하다. 문화예술 분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기술과 예술이 융합하면서 새로운 지평이 확대되고 있지만, 이로 인해 제약을 받거나 표현의 영역에서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을 종종 목격한다. 이러한 제약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데, 이를 주제로 다음 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통과됐고, 제10차 문화예술세계총회는 2025년 말 또는 2026년 한국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예술위는 미술, 공연, 문학 등 순수예술 분야의 생태계를 지원하는 기관이다. 최근 학전소극장 폐관 위기 등 순수예술 분야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순수예술은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지 못한다. 지원 없이는 순수예술을 지속하기가 어렵다. 순수예술을 지원하는 방식으로는 국가예산과 사회적 후원이 있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국가예산지원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여러 국가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부지원사업에 공모해 선정되는 비율은 22%밖에 안 된다. 대다수가 떨어지다 보니 현장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정부예산만 갖고 채워가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 후원시스템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이 발전하면 일반 제조업과 기업에도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문화콘텐츠를 수출하면 이와 연관된 패션, 화장품, 식료품 등의 산업이 동반 성장한다. 문화콘텐츠의 성공으로 다른 산업이 혜택을 누리는 만큼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의 투자가 필요하다. 기업들이 문화예술을 많이 후원할 수 있도록 기업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에 대한 홍보를 펼치고 있다. 또 기업들이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정도를 평가할 수 있는 지수를 연구개발 중이다. 이를 통해 문화예술 후원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도 확장해갈 수 있으리라고 본다.”
-20대 국회의원을 마치고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있는데 정치인으로서 활동 계획은 없나.
“대통령 비서관으로 5년을 일했고, 국회의원을 20년 했다. 25년을 국가의 예산으로 살아온 셈이다. 지난 25년 동안 국가의 예산을 받으며 경험한 것들, 축적된 노하우를 사회에 어떻게 내놓아야 할지 늘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이미 장관까지 했는데, 그 산하기관인 예술위에 가야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리가 어디든 내가 혜택을 받은 만큼 기여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예술위 일이 워낙 바쁘다 보니 정치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선거철이 되니 출마를 권유하는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만, 그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정치적으로 내가 다하지 못한 부분은 ‘청년정치학교’에서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이어가고 있다. 후배들이 정치를 잘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주는 게 내가 할 일이다.”
-총선을 앞두고 정계개편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경험을 거친 정치인으로서 여의도를 향해 해줄 말이 있다면.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들, 또 하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 ‘내가 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봤으면 좋겠다. 모든 정치인이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고 하지만, 과연 지금의 정치가 국민을 위한 일인지 돌아봐야 한다. 정치인들은 선거를 통해 심판받지만, 그 전에 공천을 통해 당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다. 강력한 양당체제이다 보니 공천만 받으면 50%는 일단 달성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 대부분이 초심을 잃고 오로지 공천받는 데만 급급하다. 정당은 같은 철학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집권을 목표로 모인 집단이다. 지금의 정당은 그러나 추구하는 정책이나 철학·가치가 아닌 공천 여부에 따라 파가 갈리는 패거리가 됐다. 이 패거리 정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지가 관건이다. 정치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여기에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데 여야를 막론하고 청년정치인들이 누군가의 대변인, 전위대 역할을 하는 현상을 자주 본다. 안타깝다. 다시 한 번 각자가 내가 왜 정치를 하는지 돌아보고 정말로 국민을 대변하는 대변자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그 역할을 가로막는 세력과 싸울 결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 용기가 없다면 정치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초·재선 의원 때 당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소장파’ 의원으로 주목받았다. 젊은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때 민주화운동을 하다 들어온 친구가 꽤 많았다. 그러다 보니 당 지도부에 대해서도 ‘아니다’라는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목소리를 내다 보니 힘이 없었다. 백전노장에 당에서 기득권을 가진, 기가 센 선배들이 윽박지르면 사실 두 번 다시 발언할 용기가 안 생긴다. 혼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당시 같은 생각을 가진 정치인들이 모여 모임을 하게 됐고, 또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함께 공부했다. 초선 때 ‘미래연대’, 재선 때는 ‘새정치수요모임’이라는 공부 모임을 열었다. 2004년 한나라당 ‘차떼기’ 사건 때 당의 쇄신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천막당사를 치고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것은 혼자가 아니라 ‘미래연대’가 주축이 돼 싸웠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어렵다. 그러나 가치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면 할 수 있다.”
-새해를 맞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들려달라.
“한국은 갈등지수가 높은 나라다. 한 통계에 의하면 갈등으로 인한 연간 지출 비용이 264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회적 갈등은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된다. 문화예술은 이런 갈등 요인을 완화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문화예술은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은 창작물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으면 창작품이 될 리 없고, 예술이 될 수도 없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예술을 감상할 수 있고,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예술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처럼 문화예술은 ‘존중’과 ‘인정’ 그리고 ‘대화’가 시작될 수 있는 토대로 기능한다. 새해에는 주간경향 독자 모두 문화예술을 많이 향유하면서 힘든 마음도 위로받고 또 공감대를 형성해가면서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는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위원들이 중심이 되는 합의제 의사결정기구로 미술, 공연, 문학 등 기초예술 분야를 지원한다. 2023년 1월 제8대 예술위 위원장으로 국회의원 5선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정병국 위원장이 선출됐다. 민간합의기구인 예술위에 정치인 출신 위원장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문체부 산하기관인 예술위는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논란의 한복판에 있었던 만큼 우려의 목소리는 높았다. 정 위원장은 그러한 논란에 대해 “동의하는 바다. 위원장직에 지원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내가 가야 할 자리가 아니고 정치인이 해야 할 자리는 아니다고 분명하게 거절했던 이유”라고 말했다. 주변의 권유가 계속됐다. 예술위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부의 영향력에 좌우되는 만큼 오랜 정치를 했고, 예술위의 역할에 대해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는 인물이 나서서 외풍을 막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정 위원장은 “블랙리스트 사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며 “예술위가 정치권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구조적 개선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21일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집에서 만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정치인이 위원장으로 취임한 것은 처음이다. 5선 의원, 전직 문화부 장관이 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는데….
“국회에 있을 때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민간합의기구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바꾸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문화예술만큼은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더라도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위상이 어떠해야 하고, 또 어떤 분들이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위원장직에 지원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내가 가야 할 자리가 아니고, 정치인이 해야 할 자리는 더욱 아니라고 분명하게 거절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예술인이 찾아와 위원회 운영의 어려운 현실을 토로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또 문화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외부의 입김, 바람을 타게 된다는 하소연이었다. 정치도 해보고 문화부 장관도 지냈고, 또 예술위의 구조를 바꿀 만큼 의지도 있으니 위원장으로 와서 외풍도 막아주고 예술위 본연의 위상을 세워주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되돌아보니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지원하게 됐고, 위원장으로 호선됐다. 처음에는 ‘정치인이 웬 말이냐’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지난 1년간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의견을 수렴해 지원시스템을 바꾸는 등 소통을 이어가면서 그러한 오해가 많이 없어졌다. 오히려 지금은 기대감이 높아져 중압감이 느낀다.”
-예술위는 한국의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책임지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흑역사도 있다. 취임 당시 ‘예술인들이 정치권에 눈치 보지 않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이를 위한 어떤 구상이 있나.
“블랙리스트 사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문제를 근절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예술위 실무진들이 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는 전담심의관제 도입을 추진 중이다. 각 분야의 전담심의관들이 지원사업을 심의·선정하고, 이후 해당 사업에 대한 모니터링과 결과 평가까지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다. 예술위가 단순히 문화부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전담심의관이 전문성을 토대로 자신의 직을 걸고 심의를 하게 되면 심의에 중심이 잡히면서 블랙리스트 같은 정치권의 외압에 휘둘릴 여지가 사라질 것이다. 현장에서도 심의에 대한 신뢰가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권위가 서리라고 본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문제를 근절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예술위 실무진들이 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는 전담심의관제 도입을 추진 중이다.”
-취임 후 1년이 지났다. 가장 보람된 일을 꼽는다면 무엇이었나.
“내부적으로 지난 10년간 정체돼 있던 지원금 심사제도를 바꿨다. 그동안 해오지 않았던 현장 업무 보고도 14차례 열어 사업관계자와 예술현장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를 토대로 사업구조를 전면 개편했다. 대표적으로 44가지로 나열돼 있던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을 17개로 단순화했다. 이를 통해 창작자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혔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높아진 문화예술 위상에 걸맞은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다. 2025년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이 건설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비엔날레는 격년제로 열리기 때문에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30주년 기념 특별전을 개최하기로 했다. 또 2023년 5월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린 국제예술위원회 문화기관 연합(IFACCA) 지도자 회의 및 제9차 문화예술세계총회에 참석했다. 3년마다 개최하는 회의인데, 그 자리에서 다음 총회는 한국에서 유치하겠다고 제안했다. 기술 발달로 인한 기술격차, 정보격차 문제가 심각하다. 문화예술 분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기술과 예술이 융합하면서 새로운 지평이 확대되고 있지만, 이로 인해 제약을 받거나 표현의 영역에서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을 종종 목격한다. 이러한 제약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데, 이를 주제로 다음 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통과됐고, 제10차 문화예술세계총회는 2025년 말 또는 2026년 한국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예술위는 미술, 공연, 문학 등 순수예술 분야의 생태계를 지원하는 기관이다. 최근 학전소극장 폐관 위기 등 순수예술 분야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순수예술은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지 못한다. 지원 없이는 순수예술을 지속하기가 어렵다. 순수예술을 지원하는 방식으로는 국가예산과 사회적 후원이 있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국가예산지원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여러 국가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부지원사업에 공모해 선정되는 비율은 22%밖에 안 된다. 대다수가 떨어지다 보니 현장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정부예산만 갖고 채워가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 후원시스템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이 발전하면 일반 제조업과 기업에도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문화콘텐츠를 수출하면 이와 연관된 패션, 화장품, 식료품 등의 산업이 동반 성장한다. 문화콘텐츠의 성공으로 다른 산업이 혜택을 누리는 만큼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의 투자가 필요하다. 기업들이 문화예술을 많이 후원할 수 있도록 기업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에 대한 홍보를 펼치고 있다. 또 기업들이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정도를 평가할 수 있는 지수를 연구개발 중이다. 이를 통해 문화예술 후원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도 확장해갈 수 있으리라고 본다.”
-20대 국회의원을 마치고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있는데 정치인으로서 활동 계획은 없나.
“대통령 비서관으로 5년을 일했고, 국회의원을 20년 했다. 25년을 국가의 예산으로 살아온 셈이다. 지난 25년 동안 국가의 예산을 받으며 경험한 것들, 축적된 노하우를 사회에 어떻게 내놓아야 할지 늘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이미 장관까지 했는데, 그 산하기관인 예술위에 가야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리가 어디든 내가 혜택을 받은 만큼 기여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예술위 일이 워낙 바쁘다 보니 정치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선거철이 되니 출마를 권유하는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만, 그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정치적으로 내가 다하지 못한 부분은 ‘청년정치학교’에서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이어가고 있다. 후배들이 정치를 잘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주는 게 내가 할 일이다.”
-총선을 앞두고 정계개편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경험을 거친 정치인으로서 여의도를 향해 해줄 말이 있다면.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들, 또 하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 ‘내가 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봤으면 좋겠다. 모든 정치인이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고 하지만, 과연 지금의 정치가 국민을 위한 일인지 돌아봐야 한다. 정치인들은 선거를 통해 심판받지만, 그 전에 공천을 통해 당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다. 강력한 양당체제이다 보니 공천만 받으면 50%는 일단 달성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 대부분이 초심을 잃고 오로지 공천받는 데만 급급하다. 정당은 같은 철학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집권을 목표로 모인 집단이다. 지금의 정당은 그러나 추구하는 정책이나 철학·가치가 아닌 공천 여부에 따라 파가 갈리는 패거리가 됐다. 이 패거리 정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지가 관건이다. 정치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여기에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데 여야를 막론하고 청년정치인들이 누군가의 대변인, 전위대 역할을 하는 현상을 자주 본다. 안타깝다. 다시 한 번 각자가 내가 왜 정치를 하는지 돌아보고 정말로 국민을 대변하는 대변자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그 역할을 가로막는 세력과 싸울 결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 용기가 없다면 정치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초·재선 의원 때 당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소장파’ 의원으로 주목받았다. 젊은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때 민주화운동을 하다 들어온 친구가 꽤 많았다. 그러다 보니 당 지도부에 대해서도 ‘아니다’라는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목소리를 내다 보니 힘이 없었다. 백전노장에 당에서 기득권을 가진, 기가 센 선배들이 윽박지르면 사실 두 번 다시 발언할 용기가 안 생긴다. 혼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당시 같은 생각을 가진 정치인들이 모여 모임을 하게 됐고, 또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함께 공부했다. 초선 때 ‘미래연대’, 재선 때는 ‘새정치수요모임’이라는 공부 모임을 열었다. 2004년 한나라당 ‘차떼기’ 사건 때 당의 쇄신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천막당사를 치고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것은 혼자가 아니라 ‘미래연대’가 주축이 돼 싸웠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어렵다. 그러나 가치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면 할 수 있다.”
-새해를 맞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들려달라.
“한국은 갈등지수가 높은 나라다. 한 통계에 의하면 갈등으로 인한 연간 지출 비용이 264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회적 갈등은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된다. 문화예술은 이런 갈등 요인을 완화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문화예술은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은 창작물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으면 창작품이 될 리 없고, 예술이 될 수도 없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예술을 감상할 수 있고,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예술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처럼 문화예술은 ‘존중’과 ‘인정’ 그리고 ‘대화’가 시작될 수 있는 토대로 기능한다. 새해에는 주간경향 독자 모두 문화예술을 많이 향유하면서 힘든 마음도 위로받고 또 공감대를 형성해가면서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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