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작은도서관 문 열게 해주세요”

2023. 12. 2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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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임대 혼합 ‘소셜믹스’ 아파트
입대의·임대의 갈등으로 개관 막혀
경기도 하남시의 한 공공분양·임대 아파트단지 내 ‘작은도서관’이 출입문이 잠긴 채 방치돼 있다. 송진식 기자



지난해 12월 27일 오후 찾아간 경기도 하남시의 A아파트단지. 이 단지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건립한 혼합단지(공공분양·임대·장기전세 공존) 아파트다. 일명 ‘소셜믹스’로도 불린다. 단지 한복판에 들어서자 주민들의 공동시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 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깨끗한 새 건물인 외관과 달리 내부는 사뭇 을씨년스러웠다. 주민카페, 방과후교실, 작은도서관 등이 있는 1층 전체가 불이 꺼진 채 찬바람만 감돌았다. 한낮인데도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방치된 지 오래된 듯했다. 잠시 1층을 서성이자 불 꺼진 사무실에서 아파트 관리 직원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여긴 입주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시설 조성이 안 됐다. 아무도 이용 안 한다”고 말한 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특히 눈에 띄는 건 1층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도서관’이었다. 유리문 현관에 도서관 개관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책꽂이에 책이 가득 꽂혀 있고, 공용 테이블 위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작은도서관만큼은 조성이 완료돼 당장 사용해도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어쩐 일인지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었다. 이 단지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2년 넘도록 커뮤니티 센터가 이처럼 무용지물로 방치돼 있는 걸까.

■집주인들 반대에 작은도서관 개관 난망

이 아파트는 정부의 공공주택 소셜믹스 정책에 따라 건립돼 현재 공공분양 210가구, 공공임대 167가구, 장기전세 307가구가 거주 중인 중대형단지다. 집주인(분양) 가구보다 임차인 가구가 2배 이상 더 많다. 입주는 2021년 2분기에 시작했다.

LH는 공공주택을 지을 때 ‘주택건설기준규정’을 준용한다. 규정에 따르면 500가구 이상 아파트단지를 조성할 때는 경로당, 어린이놀이터, 어린이집, 주민운동시설, 작은도서관, 다함께돌봄센터를 주민공동시설로 설치해야 한다. 이중 다함께돌봄센터는 입주자들이 원하지 않으면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이 아파트의 경우 경로당, 어린이놀이터, 어린이집은 각각 다른 건물(동)에 마련됐다. 그외 공동시설 공간은 커뮤니티 센터에 함께 들어섰다. 센터 1층에 주민카페·멀티프로그램실·작은도서관·방과후교실이, 2층에는 운동시설인 체력단련실이 자리 잡았다.

문제는 작은도서관 개관을 놓고 집주인들(입주자대표회의, 이하 ‘입대의’)과 임차인들(임차인대표회의, 이하 ‘임대의’) 간 갈등이 벌어지면서 시작됐다. LH는 2022년 3월 공공임대단지를 대상으로 작은도서관 지원을 위한 공모전을 벌였다. 임대의에서 커뮤니티 센터 내 작은도서관 개관을 위해 지원 신청을 했다. 그해 4월 LH로부터 도서관 운영에 필요한 집기류 구매 등 일정 금액을 지원받는 대상으로 선정됐다.

아파트단지 내 작은도서관의 실내 모습. 시설 조성이 완료됐지만 집주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개관하지 못하고 있다. 임차인대표회의 제공



그러자 입대의에서 곧장 반발하고 나섰다. 본래 의무시설로 조성된 작은도서관을 개관하는 일임에도 분양 가구 집주인들의 사전동의 없이 지원금을 신청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임대의가 “본래 임차인들을 대상으로 한 지원금”이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집주인들이 LH에 집중적으로 민원을 제기했고, 입대의 대표가 자진사퇴하면서 작은도서관 개관 문제는 차츰 미궁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입대의가 도서관 개관을 놓고 “집주인들 찬·반 의사를 물어봐야 한다”며 머뭇거리는 동안 임대의에서는 2022년 8월 초까지 도서관 개관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임대의 관계자는 “적은 지원금임에도 발품을 팔아가며 책꽂이와 탁자 등 집기류를 마련했고, 부족한 물품은 주민들의 기부를 받아 마련했다”고 밝혔다. 기부자 중에는 도서관 개관을 바라는 집주인들도 있었다. 도서관 운영위원회를 꾸려 운영위원도 뽑았고, LH가 활동비를 지급하는 ‘도서관 매니저’도 채용했다. 작은도서관이 구비해주길 희망하는 도서 신청도 받았다. 도서관의 이름도 공모해 ‘꿈이 자라는 도서관’이란 의미의 ‘꿈자람’을 선정했다.

임대의가 개관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집주인들은 지속적으로 LH와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제기했다. LH는 결국 임대의에 “시설을 사용할 수 없다”는 방침을 알려왔다. 집주인들의 동의를 구하라는 얘기였다. 집주인들에게 도서관 개관 찬·반을 묻는 입대의의 투표는 해를 넘긴 2023년 1월에야 열렸다. 결과는 부결(반대)이었다.

■“어디 세입자가 겸상을”…센터 ‘개점 휴업’

이후 임대의는 도서관 개관을 위해 LH, 하남시, 국민신문고 등에 민원을 넣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문을 열지 못했다. 입대의 측에 여러 번 도서관 문제 협의를 위한 만남과 대화를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하남시가 중재를 위해 양측 만남을 주선해 보려고도 했다. 입대의가 거절해 결국 양측이 시 관계자를 각각 따로 만나 입장 차이만 확인했다.

입대의 측은 현재 작은도서관 개관 조건으로 도서관 공간의 일부를 ‘다함께돌봄센터’로 조성해 달라고 요구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임대의 측은 입대의가 무리한 요구를 해와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임대의 관계자는 “작은도서관 면적이 총 175㎡(약 53평) 정도인데, 이중 35㎡(약 10평)만 도서관으로 쓰고 나머지(140㎡)는 돌봄센터로 하겠다고 요구해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센터 1층에 보면 다른 공간도 많은데 왜 유독 도서관 공간을 돌봄센터로 쓰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실제 센터 1층에 당초 ‘방과후교실’로 마련된 공간의 경우 현재 단지 관리업체가 사무실로 쓰는 등 용도와 다르게 사용 중이다. 아동복지법상 돌봄센터의 최소면적 기준은 66㎡(약 20평)다.

경기도 하남시의 한 공공분양·임대 아파트 내 커뮤니티센터 모습. 작은도서관 개관 문제로 주민들이 갈등을 빚으면서 센터 전체가 미사용 상태로 남아 있다. 송진식 기자



임대의는 입대의가 돌봄센터 조성을 위한 준비에 나서지 않는 점을 들어 돌봄센터를 열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하남시는 최근 공고를 내고 다함께돌봄센터를 희망하는 아파트단지들의 신청을 받았는데, A아파트는 신청을 하지 않았다. 도서관 문제를 둘러싸고 입대의와 임대의가 몸싸움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한 집주인은 “어디 세입자가 (집주인과) 겸상을 하려고 하나”며 폭언을 쏟아냈다. 양측의 감정 대립이 격화되면서 커뮤니티센터 내 다른 주민공동시설 조성도 줄줄이 중단됐다. 체력단련실의 경우 입대의가 “운영위원의 절반을 집주인들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역시 일정이 멈춰섰다. 결국 684세대, 2000여명에 달하는 주민들을 위해 마련된 공동시설과 커뮤니티센터는 2년 넘게 개점 휴업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주간경향은 작은도서관 관련 입대의 입장을 듣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했지만 접촉에 실패했다. 단지의 관리사무소에 취재 내용과 취지 등을 얘기하고 입대의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도 해봤지만, 관리사무소 측은 거절했다. “입대의가 취재에 응하는 걸 원치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이유를 댔다.

■허술한 법령, 사태 해결에 소극적인 LH

사태의 근본 원인에는 허술한 법령 문제가 있다. 주택건설기준규정에서는 단지 규모별로 조성해야 할 주민공동시설을 말 그대로 ‘규정’만 하고 있다. 조성 의무만 부여하고 있을 뿐 시설 개관이나 운영에 대한 규정은 별도로 없다. 이렇다 보니 법적 의무로 조성된 시설이라도 개관이 지연되는 문제에 대해 제재하거나 강제할 수단이 없다. A아파트처럼 입대의와 임대의가 별도로 구성된 혼합단지에서 이 같은 문제는 더욱 두드러진다. 혼합단지라도 분양동과 임대동이 분리된 경우 입대의와 임대의가 각각 단지 운영과 관리를 맡도록 법령이 개정됐지만, A아파트의 경우 분양과 임대·장기전세가 한 동에 혼재돼 있어 이에 해당하지도 않는다.

경기도 하남시의 한 공공분양·임대 아파트단지에 ‘작은도서관’ 개관을 촉구하는 임차인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송진식 기자



결국 기존 공동주택관리법에 따라 공동시설 개관이나 운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임차인들은 ‘을’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공동주택관리법에서는 혼합단지의 경우 “입주자대표회의와 임대사업자가 단지의 관리에 관한 사항을 결정한다”고 규정한다. A아파트처럼 임대의가 구성된 단지에 한해 임대사업자(LH)가 임차인들과 해당 문제를 협의하도록 돼 있다. 임차인들이 집주인들과 단지 관리 문제를 놓고 직접 협의를 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막혀 있는 셈이다. A아파트는 임차인 가구가 집주인 가구보다 2배 이상 많고, 매월 같은 관리비를 내고 있는데도 그렇다. 이 문제는 수년 전부터 논란이 돼 법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임대사업자인 LH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만 LH는 “양측 간 협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임대의 관계자는 “시청에선 그래도 현장에 나와 주민들을 만나고 중재를 해보려는 시도라도 했는데 LH는 그간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LH 관계자는 “현재 작은도서관 공간을 할애해 돌봄센터를 설치한 후 공동사용이 가능한지 여부를 하남시와 협의 중”이라며 “단지 내 시설의 운영에 있어 LH가 강제조정할 순 없다. 지속적으로 중재와 협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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