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추억의 '껌만화' 작가 아름다운 퇴장…35년 롯데제과맨 안성근씨
"'어린이 위한 일' 꿈꾸며 제과업체 일터로 삼아"…네자녀 두기도
식품홍보인으로 변신해 활동…"인생 제3막 '글쓰는 일' 하며 봉사"
[서울=뉴시스]주동일 기자 = "이젠 누군가의 엄마·아빠가 되셨을텐데, 그때 그시절 '껌만화'의 독자였던 '어린이'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올 연말 퇴임을 앞두고 서울 영등포구 롯데웰푸드(옛 롯데제과) 사옥에서 만난 '35년 롯데제과맨' 안성근씨가 소회를 밝혔다.
안씨는 1990년대 롯데껌의 대표 상품인 '만화 풍선껌'에 함께 들어간 껌만화책을 만든 작가다.
만화 풍선껌엔 껌 한개와 크기, 두께가 같은 조그만 만화책이 들어있었다.
일반적으로 껌 한 통에 6개 껌이 들어있던 반면, 만화 풍선껌엔 5개 껌과 만화책이 들어가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타 제품보다 껌이 하나 적었지만 그 시절 대한민국 어린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사봤을 정도로 호응을 얻었다.
스마트폰은 커녕 PC(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 껌과 만화책은 무료하거나 고단한 시간을 달래주는 기호식품이자 문화 콘텐츠였다.
'껌 만화' '껌 종이 만화'라고도 불린 작은 만화책엔 이솝우화와 전래동화처럼 어린이들을 위한 교훈적 이야기가 담겼다.
맨 뒷장엔 안씨가 그 시절 독자들에게 건넨 인사와 같은 '어린이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1962년생으로 예술고와 대학에서 각각 미술과 디자인을 전공한 안씨는 1989년 당시 롯데제과 도안과에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1994년 '선전부(광고실)'로 부서를 옮기기 전까지 롯데제과의 다양한 상품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쥬시후레쉬' '스피아민트' '이브' '제크' '월드콘' '엄마손파이' 등 롯데제과의 대표 스테디셀러들도 그의 손을 거쳐갔다.
안씨는 "처음 입사하면 종합선물세트를 디자인하는데, 감사하게도 그림이 좋다는 평가를 많이 들었다"며 "그러면서 껌 디자인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껌은 인기가 높지만 상품 크기가 작아 디자인 난이도가 높은 '작품'으로 꼽혔다. 제과 업계에선 고참 디자이너만 껌 디자인을 맡을 수 있었다.
그는 "디자인을 맡은 껌 중 하나가 만화 풍선껌이었다"며 "제과회사에 들어온 이유가 '어린 아이들에게 밝은 꿈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던 만큼 일할 때 정말 즐거웠다"고 했다.
또 "만화를 그리고 제품을 디자인할 때도 아이들의 정서에 부합하려고 많이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만화엔 전래동화와 이솝우화 등 아이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겼다.
제작 업체와 스토리 작가 등과 함께 1년에 40부에 달하는 만화를 만든 덕에 소비자들은 껌을 살 때마다 다른 만화를 볼 수 있었다.
안씨는 "길을 걷다가 제가 디자인한 껌종이나 만화가 버려져있으면 주워서 집까지 가져갔다"며 "마음이 아프기보단 길에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서 '저거 내가 디자인한 건데' 하면서 주워갔다"고 덧붙였다.
남다른 안씨의 애정은 소비자들에게도 전달됐다. 껌 만화를 모으는 사람들부터 조그마한 종이를 이어 붙여 껌 만화를 따라 만드는 초등학생들까지 등장했다.
안씨는 "그 시절 껌은 어린이 뿐 만 아니라 방황하는 학생, 공단 근로자, 버스 차장, 직장인까지 많은 서민의 애환이 담겼다"며 "그 시절 어린이분들이 현재 성인이 돼서 '왜 요즘은 만화 풍선껌이 안 나오냐'고 전화를 주실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정말 감사하다"고 전했다.
1994년 안씨는 선전부로 자리를 옮겨 광고제작과 홍보 업무를 맡으면서 인생 2막을 맞았다.
홍보인으로 '변신'한 계기를 묻자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안씨는 "그때만 해도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도 많았는데, 저는 아이가 네명이다 보니 현대차 '포니2'를 중고로 사서 타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 홍보 담당자들은 보도자료를 일일이 출력해 갱지 봉투에 담아 언론사에 전달했다.
안씨 역시 자동차에 보도자료를 싣고 2~3일에 걸쳐 언론사들을 발로 뛰며 회사 소식을 알렸다.
그는 "하도 언론사 근처 도로에 차를 주차해서 나중에 폐차할 때 '딱지'가 60만~70만원 나왔다"며 "사실 처음엔 그림만 그릴 줄 알았지 글을 쓰는 건 처음이라 어려웠다"며 웃었다.
회사 선배들과 출입 기자들에게 글쓰는 법을 배우고 다양한 전문 서적을 공부하면서 작법을 공부한 그는 '인생 3막'에도 글쓰기를 계속 이어나갈 예정이다.
안씨는 "외부 기고나 연감 등으로 꾸준히 글을 쓰다 보니 재미가 붙었다"며 "앞으로도 공부를 하면서 내 달란트(재능)로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도움을 주는 일을 하려고 한다"고 했다.
또 "직장을 다니면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5년 정도 했는데, 이제 비교적 여유가 생겼으니 봉사 활동도 계속할 계획"이라며 미소 지었다.
퇴임을 앞두고 35년의 장기 근속 비결을 묻자 신념과 신앙, 가족을 꼽았다.
그는 "크리스천이다보니 어느 자리든 가리지 않고 정말 성실하게 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항상 있었다"며 "성경에 나오는 바울 역시 천막공이었지만 훗날 위대한 인물이 되었듯이, 항상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줄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마음도 큰 힘이 됐다"며 "과자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과자처럼 건강한 위로와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항상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또 "가장으로서 네자녀(3녀1남)를 양육하다보니 항상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며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직장을 충실히 다니려고 했다"고 답했다. 이미 장녀와 차녀가 결혼해 손주 둘을 둔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안씨가 인생 절반 이상을 몸담아 온 롯데제과는 지난해 롯데푸드와 통합돼 올 4월 56년 만에 사명을 롯데웰푸드로 변경했다.
앞으로 '친정'인 롯데웰푸드가 미래에 어떤 회사가 되길 바라는지 묻자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은 사람일 것"이라며 "일하시는 분들 모두 이 직업에 소신과 철학을 갖고 임해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회사도 앞으로도 이런 인재들을 더 귀하게 여겨주고,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펼칠 수 있는 더 훌륭한 일터가 되도록 만들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당부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jdi@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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