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이래 가장 중요한 법’···‘타이틀 나인’ 제정의 역사[책과 삶]
타이틀 나인
셰리 보셔트 지음 | 노시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624쪽 | 2만9000원
1972년 미국 의회를 통과한 ‘교육개정법 제9편’은 “미국에서 그 누구도 성별을 이유로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 또는 활동에서 제외되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차별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후 ‘타이틀 나인’이라 불린 이 법은 “미국 교육에서 성차별을 금지한 최초의 법”으로 기록됐다. 일각에선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이래 가장 중요한 법’이라고도 표현한다.
초반 구절만 읽으면 교육기관 내 성차별을 완곡하게 반대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법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진 이유는 무엇일까.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셰리 보셔트는 타이틀 나인 제정 전후의 사건과 사람들, 이 법이 이후 50여년간 미친 영향, 이 법에 대한 옹호와 반발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이 기록은 곧 미국을 비롯한 여러 지역 성차별의 역사, 한때 성차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던 이들에 대한 고발, 무언가 불편하고 꺼림칙했으나 그것을 ‘차별’이라고 명명하지 못했던 이들의 각성 과정이기도 하다. 아울러 성차별에 더해 유색인종, 장애인, 빈곤층, 이민자, 성소수자 차별 등 날로 복잡하면서 중요해지는 ‘교차성’ 개념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책은 자녀 양육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다가 36세에 다시 공부를 시작해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버니스 샌들러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41세가 된 샌들러는 모교 메릴랜드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 교수직 채용을 문의했지만, 대부분 면접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한 메릴랜드대 교수는 “솔직히 말해서, 버니, 당신은 여자치고는 너무 드세요”라고 말했다. ‘솔직한’ 답변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까. 이후 샌들러는 ‘드센 여자’가 되기를 멈추지 않았다. ‘취직이 안 되는 것은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여기기보단, 눈앞에서 자신을 가로막고 있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장벽에 ‘성차별’이란 딱지를 붙이기로 했다. 샌들러는 1963년 제정된 평등법, 1964년 제정된 민권법과 관련 행정명령을 찾았다. 그리고 1967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발표한 행정명령에 ‘연방정부 계약자에 의한 성차별’이 금지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다수 대학교는 곧 연방정부 계약자였기에, 이를 이용하면 대학에 채용 등 여러 면에서 성차별 금지를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샌들러를 비롯한 많은 활동가, 의원, 민권 변호사, 교직원, 운동선수 등이 학내 성차별을 고발하고 이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기 위해 나섰다. 사방에 보낸 편지지 사본 상단엔 “건방진 여자들이 뭉친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남편이 누구냐”고 물어대는 기자들에 대항해 ‘익명의 자매회’라고 단체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법 제정이 쉬울 리 없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같은 주류 언론은 타이틀 나인에 대해 “의도는 좋지만 그런 법률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하버드, 예일 같은 엘리트 사립대는 타이틀 나인을 통한 정부 간섭에 반대한다는 서한을 대량으로 국회에 보냈다. 이들 언론사와 국회에는 타이틀 나인으로 인해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받을 수 있다고 걱정하는 백인 남성들이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타이틀 나인이 가장 먼저 효과를 발휘한 곳은 여학생 입학과 여성 교원 채용 분야였다. 남성 특히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식축구 분야에 한정됐던 스포츠 활동 지원도 다소 개선됐다. 학내 집단 강간이나 교수에 의한 성추행에 별다른 제재가 없던 문화에도 미약하나마 균열이 생겼다.
물론 타이틀 나인은 불완전한 법이다. 인종, 계급, 장애 등으로 인한 다양한 차별을 포괄하지 못하고, 적용 범위도 제한적이다. 기존 체제에 흠집을 내기 위한 법 제정에 힘쓰는 이들이 겪는 딜레마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하다. 샌들러는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좋은 것을 버리지 말자”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샌들러를 타협주의자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법 제정의 동력은 쉽게 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기회가 왔을 때 더 강력한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성적 지향을 차별금지 항목에 넣어야 할지를 두고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여성 운동선수에 대한 지원이 늘어났지만, 이는 부유한 백인 여성 운동선수에 대한 지원일 뿐 유색인종 여성 운동선수는 여전히 차별받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보셔트 역시 “교차적 관점에서 봤을 때, 타이틀 나인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법이 제정됐다고 끝이 아니다. 법과 시행규정이 사문화되지 않는지 끊임없는 감시가 필요하다. 정권 향배에 따라 타이틀 나인엔 수많은 유보 조항이 붙기도 했다. 보수 정부는 관련 조직의 인원을 감축하거나 엉뚱한 사람을 관리자로 발령하거나 예산을 줄이는 방식으로 법의 집행을 무력화했다.
2016년 샌들러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소식을 듣고 걱정하는 딸에게 “길이란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야. 멀리 보고 바른길을 가야 해”라고 위로했다. 보셔트도 “이 책의 결말은 간단히 말해서 이 이야기에 결말이 없다는 것”이라며 “눈가리개를 벗은 사람은 본 것을 안 본 것으로 되돌릴 수 없다”고 적었다. 보셔트는 한국어판 서문에 <타이틀 나인>이 한국의 차별금지법 논의와 운동에 이바지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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