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가족 찾아달라"는 캄보디아 오지의 한국 할머니, 분노가 치미는 슬픈 정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8일 방송된 '오지 할머니의 비밀'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개그맨 서경석, 배우 김미경, 뮤지컬 배우 배다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캄보디아의 '훈 할머니'
때는 1996년, 한 남자가 우거진 숲 속을 헤매며 뭔가를 찾고 있어. 남자가 찾는 건 이거야.
'공사인'이라고 위장에 좋은 약재래. 이 곳에선 이걸 공사인이 아니라 '끄로완'이라 불러. 여긴 한국이 아닌, 캄보디아의 스쿤이라는 작은 마을의 숲이야. 이 공사인을 찾아 헤맨 남자는 한국의 사업가 황기연 씨. 이 약재가 캄보디아에 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거야. 근데 문제가 좀 있어. 여기 캄보디아의 도로 사정도 안 좋고, 현지 일꾼을 확보하기가 어려워. 결국 눈 앞의 공사인 노다지를 뒤로한 채, 기연 씨는 차를 타고 사무실이 있는 프놈펜으로 향했어.
그런데 갑자기, 한 여성이 길 한가운데서 차를 세우더니 프놈펜까지 태워 달라고 부탁해. 이 마을이 버스도 안 다니는 오지에 있거든. 그렇게 기연 씨는 이 여자를 차에 태우게 됐어.
여자의 이름은 '싯나'야. 그런데 그 땐 몰랐어. 이 우연한 만남이 어떤 사건으로 이어질지.
함께 차를 타고 가며 어설픈 캄보디아어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연 씨는 한국에서 온 한국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어. 그러자 싯나가 깜짝 놀라. "그랜마 꼬레"라며, 자신의 할머니도 한국 사람이라는 거야. 싯나가 한국인 혼혈이라는 걸까? 같은 아시아인이라 외모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워. 그런데 이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좀 이상해. 1996년은, 한국과 캄보디아의 외교가 단절된 지 20년도 넘은 상태였어. 이민은커녕, 한국에서 캄보디아로 여행 온 사람도 없는데, 싯나의 할머니가 한국인이란 게 좀 이상하지. 순간, 기연 씨의 '오지랖'이 발동했어. 싯나에게 다음에 시내 나올 때 할머니를 한 번 모시고 오라고 했어.
며칠 후, 기연 씨의 동업자 친구 광준 씨가 캄보디아에 왔어. 광준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기연 씨는 여기 오지 마을에 한국인 할머니가 있다는 이야기도 했어. 그런데 마침 그 때, 싯나가 할머니를 모시고 온 거야. 할머니를 마주친 순간, 두 친구는 좀 당황했어.
할머니의 캄보디아 이름은 '훈'인데, 훈 할머니는 한국인보다 캄보디아 현지인으로 보이는 외모였던 거야. 캄보디아에 너무 오래 살아서, 외모도 현지화된 걸까? 첫인상은, 그냥 캄보디아 토박이였어.
"할머니가 처음에 딱 들어오실 때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이라고는 전혀 인정하기 어려운 외모죠. 뭐부터 물어봐야 하나 할머니 한 번 쳐다보면서도 '한국 사람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쳐다봤죠. '한국말 하실 수 있는 거 있으세요?' 그랬더니 기억이 안 난대. 전혀 기억이 안 난대. '끄놈 꼬레', '나 한국 사람이다' 이런 얘기죠. 할머니가 한국말 전혀 못 하시면서 한국 사람이라고 여러 번 얘기하면서 믿어달라고 하시는데, 한국 사람이라곤 전혀 볼 수가 없는 그런 모습이고…"
-이광준, 당시 캄보디아 방문
서툰 캄보디아어로 한국어를 모르는 할머니와 소통하는 건 쉽지 않았어. 차 한잔 대접하고, 훈 할머니와의 만남은 끝이 났어. 어쨌든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던 손녀 싯나에게 가사도우미 일을 맡겼어.
그러던 어느날, 싯나가 집안일 하는 모습을 무심코 보던 광준 씨가 이상함을 느꼈어. 그동안 봐왔던 동남아 사람들과는 집안일을 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거든. 첫번째, 손빨래. 한국에서는 빨래판에 대고 박박 문지르거나 빨랫감끼리 비벼서 빠는 방식이잖아? 캄보디아 사람들은 비눗물에 옷을 넣어 설렁설렁 흔들어 빠는 방식이야. 그런데 싯나는 손으로 박박 문지르는 건 기본이고, 방망이로 때리면서 손빨래를 했어. 완전 한국 스타일이야.
두번째, 과일 깎는 모습. 보통 한국에서는 사과를 과도로 깎을 때 껍질을 안쪽으로 둥글게 말아 깎아. 반면 동남아 사람들은 칼을 바깥으로 향하게 쥐고 과일 바깥쪽으로 껍질을 밀어 깎는 스타일이야. 그런데 싯나는 과일을 안쪽으로 깎았어. 이것도 역시 한국 스타일이야.
싯나에게 집안일을 누구한테 배웠냐고 물었더니, 할머니한테 배웠대. 싯나 뿐만 아니라 싯나의 어머니까지, 싯나네 가족은 모두 한국 방식으로 집안일을 했어. 광준 씨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고, 다시 한 번 '오지랖'이 발동했어. 두 친구는 훈 할머니를 다시 만났어. 이번엔 통역해줄 사람을 대동해서.
훈 할머니는 자신이 진짜 한국 사람이 맞다고 했어. 한국 이름을 기억하냐고 물었더니, 다행히 그건 기억했어. 할머니가 미소와 함께 말한 자신의 한국 이름은 '나미'였어. 하지만 성은 기억나지 않는대. 할머니한테 고향은 기억하냐 물으니, '진동'이라고 답했어. 진도, 진주, 진해, 진천 등 '진'이 들어간 한국 지명들이 많은데, '진동'은 처음 들었어. 작은 단위의 마을 이름 같기는 한데, 진동이라는 발음조차도 정확하지 않아. 그런데 할머니의 표정이 너무 간절해.
"죽기 전에 가족을 꼭 한 번 만나고 싶어. 나를 좀 도와줘."
한국에 가서 가족을 만나는 게 훈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래. 50년 넘게 한국에 가지 못했고, 가족들 생사도 모른대. 문제는 가족들 이름도 기억을 못해. 위로 언니가 한 명, 남동생, 여동생까지, 1남 3녀 중 본인이 둘째라는 거 빼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대. 캄보디아에 온지 50년이 넘었다는데, 오게 된 사연에 대해선 대답이 없으셔. 묵묵부답이야. 그러니 의문만 꼬리에 꼬리를 물어. 훈 할머니, 한국 사람이 맞는 걸까? 그 판단은 둘째치고, 정보가 너무 적어. 할머니는 가족들을 만나고 싶으시다는데, 이 정도 단서로는 도움을 드리기가 힘들어. 그럼, 퍼즐을 맞춰 봐야지.
▲ 나를 찾아줘
할머니가 캄보디아에 온 건, 17~18살이던 1942년이야. 일제 강점기에 10대 소녀가 고향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 캄보디아까지 올 만한 이유는 뭘까. 혹시 훈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캄보디아에 끌려 왔다가,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그 곳에 남겨진 건 아닐까? 가능성이 있을 법한 추리지. 이 추리를 뒷받침 할 수도 있는 지도를 하나 보여줄게.
이건 일본군 위안소들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야. 중국,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그리고 캄보디아에도 있었어. 나라마다 곳곳에 설치된 위안소. 지도만 봐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그런데, 이렇게 까지라고 생각했어. 이게 전부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어.
이 지도는, 최근 조사 끝에 제작된 위안소 지도야. 이렇게나 많았어. 그런데, 위안소 위치는 일본이 공식적으로 공개한 적이 없어. 그럼 이 지도는 누가 만든걸까? 일본의 한 민간단체가 만든 거야. 피해자와 목격자의 증언, 일본 내에서 발굴한 자료와 공문서를 참고해서 11년에 걸쳐 만든 지도래. 일본에도 이렇게 양심있는 사람들이 있긴 해.
그런데 왜 위안소는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 있었을까? 전쟁이 있는 곳에 위안소가 있었으니까. 일본은 1941년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어. 일본이 동남아시아 지역과 태평양 섬들을 순식간에 장악했어.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는 어느 곳이든 위안소가 있었다고 해. 그런데 일본 여자를 동원하면, 자신의 누이들이 동원됐다는 생각에 사기가 떨어진다고 해서 다른 나라에서 위안부 여성을 찾았어.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서. 특히 경상도 지역의 여자들이 많이 동원됐어. 부산항과 가까워 배에 태워 아시아 각지로 보내기 쉬우니까.
그렇다면 혹시 훈 할머니도, 이 때 끌려간 소녀 중 한 명이었을까? 광준 씨는 조심스럽게 할머니한테 여쭤봤어.
"할머니가 굉장히 영민하세요. 그래서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할머니하고 대화했어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며 '여기 그때 일본군들 안 있었어요?' 했더니, 조심스럽게 쳐다보시더라고. '이 녀석이 뭘 아나?' 싶으셨던 거죠. 손을 딱 잡으면서 그렇다고, '나 살아온 거 아무한테도 말도 못해' 그러시면서 그렇게 우시더라고요.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할머니에 대해 알기 위해서 질문을 자꾸 하다보니까 저는 확신을 했죠. 한국인이시고, 위안부로 오신 분이다."
-이광준, 당시 캄보디아 방문
해방된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우리나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캄보디아 오지에 남아있는 '위안부' 피해자야. 한국말과 한국에 대한 기억도 모두 잊은 채로. 두 친구는 우리나라 법무부와 외교부에 할머니의 사연을 알렸어. 그러자 좀 곤란하고 귀찮다는 반응이야. 기억도 확실치 않고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한다는데, 어떻게 한국인인지 믿을 수 있냐는 거야. 오지랖 넓은 두 친구, 기연 씨와 광준 씨는 포기하지 않았어. 두 친구는 한가지 돌파구를 찾았어. 바로 '언론 제보'. 다행히 프놈펜의 한 신문 기자가 훈 할머니의 사연에 큰 관심을 보였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편함.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그녀는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 몇 마디 제외하고 모국어를 잊어버렸다. 그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최근 몇 년동안 밝혀진 여러 여성들과 함께 한 이야기 중 하나이다. 훈 씨의 경우 죽기 전에 진동을 다시 만나는 것이 유일한 꿈인 만큼 현생에서 일말의 희망은 있어 보인다."
-당시 신문 기사 내용 中
기사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어. 캄보디아는 물론이고 한국 언론들도 뜨거운 취재경쟁을 시작했어. '진동'이란 지명을 가진 마을들도 바빠졌어. 할머니의 기억이 불확실할 수도 있으니, 비슷한 발음의 마을들까지 난리가 났어. 전국에 '진동'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마을은 무려 90개나 됐어. 그 중 정확히 '진동'이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은 11개야.
유력한 후보지로 꼽힌 곳은 마산시 진동면이었어. 여자들이 많이 끌려갔던 경남 지역인데다가, 진동면 사람들은 "어디에 사냐"는 질문에 "진동에 산다"라고 답하곤 했대. 진동면사무소는 즉시 훈 할머니 가족 찾기 대책본부를 마련해. 노인정, 재래시장, 어르신들이 많은 곳에 전단지가 뿌려졌어.
그러던 중, 유력한 제보 하나가 들어왔어. 훈 할머니가 진동초등학교 동창생 '김남아'가 틀림없다는 제보였어. '나미'가 아닌 '남아'라는 주장이야. 나이와 얼굴이 비슷하다는 거야. 대책본부는 김남아 씨 가족한테 연락했어. 그런데 김남아 씨의 남동생이, 누나는 1944년 대만에서 사망했다고 전했어. 가족들은 사망 통지서와 유골은 받았는데, 시신은 확인하지 못 했대. 혹시, 죽은 줄 알았던 누나가 캄보디아에 살고 있었던 걸까? 훈 할머니와 남아 씨 가족은 영상통화를 진행했어. 그러자 남아 씨 가족은 훈 할머니가 혈육이 맞는 거 같다는 거야.
그런데, 김남아 씨 가족 정보와, 훈 할머니의 기억 사이에 조금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어. 훈 할머니는 1남 3녀 중 둘째라고 했는데, 남아 씨는 장녀야. 또 남아 씨는 대만에 있을 때 가족들과 수차례 편지를 주고 받았고, 휴가를 받아 한국에 온 적도 있었대. 한국을 떠난 뒤 한 번도 고향에 가본 적 없다는 훈 할머니 말과 다르지. 정확히 알기 위해, 훈 할머니와 남아 씨 가족은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어.
그 결과는, 불일치였어. 훈 할머니는 김남아 씨가 아니었어. 그 후에도 많은 제보가 쏟아졌지만, 전부 아니었어. 가족은 나타나지 않았어. 훈 할머니를 향해 불타 올랐던 관심은 식었고, 심지어 의혹의 목소리까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어.
▲ 의심 그리고 모욕
훈 할머니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긴 해. 17~18세까지 한국에 살았는데, 어떻게 모국어를 잊을 수가 있는지. 게다가 자신의 성과 가족의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좀 의아하긴 하지. 의심하는 목소리들 사이에는 심지어 "진짜 일본군 위안부 맞아? 혹시 한국 정부 지원금 받으려는 속셈 아니야?"라며 차마 입에 담기 미안한 의혹들까지 쏟아졌어. 그런 의심의 눈초리에도 훈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어.
"누가 뭐라해도 나는 한국인이다. 믿어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살아서 고향 땅을 한번 밟고 싶다는 것 외에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훈 할머니. 어쩌다가 모든 기억을 다 잊은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할머니가 꼭 닫고 있는 기억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봐야 해. 그 기억의 문을 열기 위해, 훈 할머니를 만나러 캄보디아로 향한 사람이 있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 1993년 UN 인권 위원회에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하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위안부의 현실을 알리는 활동을 하셨어. 김복동 할머니는 14살 때 공장 취업이라는 말에 속아 위안소로 끌려갔어.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일본군의 침략 경로대로 끌려 다니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셨어. 훈 할머니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들어주실 분이야.
두 분의 만남은 어땠을까. 훈 할머니는 김복동 할머니의 손을 맞잡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셨어. 하지만 훈 할머니는 김복동 할머니와의 만남에도 기억의 문이 열리지 않았어. 입을 꾹 닫고 말씀이 없으셨어. 그렇다고 해서 훈 할머니를 재촉할 수는 없어. 그 지옥 같은 기억을 되살리라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잖아. 천천히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시간을 좀 더 갖기로 해.
그렇게 3일째 되던 날, 훈 할머니는 조금씩 기억을 내뱉으셔. 그리고는 다시 입을 꾹 닫고, 그러다 또 짧게 툭 뱉었다가, 다시 입을 꾹 닫고. 천천히 마음을 열면서도, 확실히 말씀을 하지는 않으셔. 훈 할머니를 면담한 연구원은 할머니의 짧은 증언 속에서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대. 바로 '몸의 언어'였어. 위안부 할머니들이 피해 사실을 증언할 때 공통점이 있다고 해. 정말 끔찍하게 몸서리치는 표정과 몸짓, 그리고 절대로 꾸며낼 수 없는 고통의 흔적들. 훈 할머니도 그랬어.
지금부터 훈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줄게. 평생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야.
▲ 나미, 하나코, 훈
때는 1942년, 모내기를 할 때였으니 4~5월쯤 됐을 거래. 지금부터는 할머니가 아는 자신의 이름 '나미'라고 부를게.
어느날 나미의 집에 일본군들이 쳐들어왔어. 강압적인 분위기로 짐을 챙기라고 했어. 나미는 울면서 가방 속에 옷과 가족들 사진 몇 장을 넣었어. 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물을 수도 없어. 아버지는 계속 눈물만 흘려. 그리고 집을 나서며 뒤돌아 보니, 어머니는 이미 실신해서 바닥에 쓰러져 있어. 그리고 옆집에 살던 스무살 총각, 나미를 짝사랑해서 결혼하자고 조르던 남자가 있었어. 그 집 앞을 지나던 짧은 순간, 총각을 찾아보는데 보이지가 않아. 동네 여기저기서 나미처럼 다른 여자들도 끌려 나와.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아.
진동을 벗어나 부산항에서 큰 배에 올라탔어. 배에는 군인과 여자들이 무척 많았어. 간호부를 모집한다는 말에 따라 나섰다는 여자들도 있고, 나미처럼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그냥 끌려온 여자들도 있었어.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여전히 물을 수도 없어.
부산을 떠난 배는 대만을 거쳐 싱가포르로 향했어. 싱가포르는 1942년 2월부터 일본이 점령한 상태였어. 9명의 조선 여자들이 싱가포르에 내렸고, 그 중에 나미도 있었어. 고향을 떠난 지 보름정도 지났을 때야. 나미와 여자들은 한 건물로 안내 받았고, 한 사람씩 방을 배정 받았어. 이곳은 공장도 병원도 아닌, 일본군 위안소였어.
일본인들은 나미한테 '하나코'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줬어. 일본군들은 매일같이 찾아와 나미에게 몹쓸 짓을 했어.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어느날, 무작정 도망쳤대. 하지만 여기는 싱가포르야. 조선에서 온 시골 소녀는 곧 붙잡혔고, 또 다시 방안에 갇혀 몹쓸 짓을 당해. 끔찍한 성폭력을 겪으며 싱가포르에서 한 달을 지낸 어느날, 나미는 다시 옮겨졌어. 일본군대가 옮겨가는 곳이면, 그 곳이 어디든 끌려가야 했던 거야.
나미는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했어. 어느새 고향을 떠날 때 가져온 물건과 가족사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다시 잔인한 나날들이 이어져. 문 앞에 줄지어 선 일본군인들은 군홧발로 문을 차고 두드리며 재촉했어. 그리고 나미에게 칼을 휘두르는 군인도 있었어. 그날의 흉터는 평생 지워지지 않았어.
1945년 어느날, 한 남자가 나미의 방을 방문했어. 이 사람이야.
남자의 이름은 다다쿠마 쓰토무. 일본군 장교였는데, 캄보디아 국왕 경비대를 훈련시키는 책임자였어. 다다쿠마는 꽤나 젠틀했어. 나미를 자기집에 데려가기도 하고, 반지도 건네며 애정을 표현했어. 1945년이면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던 해야. 다다쿠마를 만나고 얼마 안돼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어. 일본군은 점령지를 떠나야 해. 그럼, 머나먼 이국땅까지 끌려온 위안부들은 어떻게 됐을까? 단순히 버리고 간 정도가 아니야. 죽이기도 했어.
이 끔찍한 사진 뒷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어.
"일본군과 중국군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텅충에서 여성들이 살해되었다"
"사상자-조선인"
당시 연합국 작전 일지에도 이런 기록이 있어.
"1944년 9월 13일 밤 일본군이 중국 윈난성 텅충에 있는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였던 1944년 9월, 미-중 연합군은 일본이 점령 중이던 텅충 지역을 공격했어. 함락 직전에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조선인 위안부를 총살했다는 사실이 문서로 남아있는 거야.
일본군은 위안부를 전쟁터에 그대로 버려 두기도 했어.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취급한거지. 그렇게 버려진 위안부 피해 여성 중에는 미군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있다가 귀향한 경우도 있지만, 수치심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고 해.
그럼 캄보디아의 나미는 어떻게 됐을까?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에 다시 프랑스군이 캄보디아를 점령했어. 어느 단체에선가 조선인 본국 송환을 추진했어. 나미도 다른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함께 귀국선으로 가는 트럭에 올라. 그런데 그 때, 다다쿠마가 급히 찾아왔어. 자신은 철수하지 않고 캄보디아에 남아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울 거래. 그러면서 "나랑 같이 있자. 널 지켜주겠다"고 나미한테 애원해. 나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미는 다다쿠마의 말을 믿었어. 캄보디아에 남은 다다쿠마와 나미는 프랑스군의 눈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어. '훈'이라는 캄보디아 이름은 이때 생긴 거야.
1946년, 나미는 밀림에 숨어 딸을 낳았어. 다다쿠마의 딸이야. 딸의 이름은 '카오'. 아기를 낳은 후에도 딸을 데리고 산 속에 숨어 지내야 했어. 다다쿠마는 가끔씩만 찾아왔대. 그렇게 숨어지낸 세월이 7, 8년이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캄보디아의 오지, 밀림 속에서 어린 딸을 데리고 그 오랜 시간을 견뎠어. 훈 할머니의 손녀인 싯나는 카오의 딸인 거야.
'꼬꼬무'가 캄보디아에 가서 훈 할머니의 손녀, 싯나 자매를 만났어.
"어머니 카오는 숲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인근 주민들이 음식과 마실 것을 주셨다고 했어요."
-싯나, 훈 할머니 첫째 손녀
"군인들이 올 때는 설탕이 들어 있는 솥에 숨어 있어야 했다고 하셨어요. 당시 캄보디아에 일본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있을 때였거든요. 할머니는 캄보디아에서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어요."
-짠니, 훈 할머니 셋째 손녀
딸이 커갈수록, 나미는 아이의 아빠 다다쿠마가 어서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렸어. 그러던 어느날, 충격적인 소문을 듣게 돼. 다다쿠마에게 새로운 중국인 부인이 생기고, 그 사이에 딸도 있다는 거야. 그 소문은 사실이었어. 1953년, 캄보디아의 프랑스 식민 통치가 끝나자, 다다쿠마는 나미를 버리고 일본으로 떠나 버렸어. 그렇게 조선의 시골 소녀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왔다가, 일본군 사이에 낳은 그 딸과 함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캄보디아에 버려진 거야.
"(위안부에 대해 말하는걸) 싫어하시고 그 일을 숨기셨어요. 할머니의 과거가 그렇게 고통스러웠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저희 네 자매는 '할머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한국에 가실 수 있게 방법을 찾아볼게요'라고 했어요. 할머니를 정말 사랑해서 할머니가 한국에 가실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보내드리고 싶었어요."
-짠니, 훈 할머니 셋째 손녀
그토록 사랑했던 딸과 손녀, 가족 누구에게도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말하지 못 하셨어. 훈 할머니가 한국어와 기억을 왜 잃어버렸는지,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되지.
우리가 훈 할머니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이유, 할머니가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지. 그 수많은 의혹들을 잠재워줄 증인이 딱 한 명 있어. 바로 그 남자, 다다쿠마. 다다쿠마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일본에서 번듯하게, 의회 관련 일을 하고 있었어. 그는 훈 할머니를 기억할까? 한국의 취재진이 찾아가자 그는 몹시 당황했어.
"넓은 얼굴 윤곽이 당시와 똑같아요. 훌륭한 여자였죠. 착하고, 얌전하고, 진실한… 위안소는 프놈펜과 공항 사이 주택가에 있었죠. '하나코'라는 이름밖에 몰랐는데 '훈'이라고 했나요?"
-다다쿠마 쓰토무, 당시 아시아태평연합의원 일본 사무국장
다다쿠마는 훈 할머니를 모른척하지는 않았어. 프놈펜의 위안소에서 만난 것도 인정했어. 하지만 자신과의 사이에 딸이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고 잡아뗐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 다다쿠마의 증언으로 훈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사실은 확실하게 증명됐어.
캄보디아에 홀로 남겨진 서른 살의 나미. 나미는 살아남기 위해서 캄보디아 남자와 재혼했어. 그 남편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뒀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어. 남편이 술주정뱅이였거든. 나미는 또 다시 홀로 아이들을 키웠어.
근데, 캄보디아에 또 다시 엄청난 일이 벌어져. '킬링필드'라 불리는 집단학살.
1975년 캄보디아는 급진 공산주의자인 폴 포트가 정권을 잡았어. 폴 포트는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과거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공무원, 정치인, 군인들을 가리지 않고 처형했어. 안경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지식인으로 취급해 그냥 죽이기도 했고, 외국인들도 학살의 대상이었어. 킬링필드(Killing Fields), 집단 매장지를 뜻하는 말이자, 4년에 걸쳐 이루어진 대학살을 일컫는 말이야. 이때 학살된 사람은 무려 200만 명,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야. 나미는 또 역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어. 하지만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
그러던 어느날, 외출 나갔던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그 아들이 학살 당하고 만 거야. 할머니는 남은 자식들을 위해, 캄보디아인이 되어야 했어. 한국인도, 일본인도, 위안부 출신도 아니어야 했어. 그렇게 나미는 지워졌어. 자기 자신의 기억에서조차.
캄보디아 오지에서 살아남은 훈 할머니는, 5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을 만났던 거야. 바로 기연 씨와 광준 씨.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할머니의 간절한 소원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 55년 만에 밟은 고향땅
몇몇 기관의 도움으로, 드디어 훈 할머니가 한국땅을 밟았어.
그리고 할머니는 한국의 기자들을 보자 바로 이걸 들어 보였어.
"내 이름은 나미입니다. 혈육과 고향을 찾아주세요."
한글자 한글자 꾹꾹 담아 쓴, 평생의 소원. 할머니는 "(한국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한국에 오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아주 기쁩니다"라고 울컥해 하며, 기억하는 고향의 노래 '아리랑'을 불렀어. 한국어는 다 잊었지만, 이 노래만큼은 정확히 기억했어.
일단, 할머니가 기억하는 고향 '진동'이 어딘지 정확히 알아야 해. 할머니 기억 속, 고향 '진동'의 모습은 이랬어.
"집 마당엔 큰 솥이 있었습니다. 사립문을 나서면 바로 논이었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맞은편에 산이 보였어요. 산 오른쪽 봉우리엔 절이 있었는데, 절을 오르다 숨이 차면 절 입구 나무에 잠시 기대어 쉬어 갔습니다. 집에서 걸어가면 바다가 있고, 염전이 있었어요. 마을을 가로질러 시내가 흐르고, 여름밤이면 친구들과 냇가에서 멱을 감았습니다. 남자애들은 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할머니 고향에 대해 또 다른 증언을 한 사람이 있어. 바로 다다쿠마야.
"고향이 인천이라고 했었으니까. 인천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인천을 알아요. 인천은 항구죠?"
-다다쿠마
과거 인천엔 논도 절도 바다도 염전도 있었어. 할머니는 바로 인천으로 향했어. 그런데, 아니야. 할머니에게 익숙지 않은 지형에, '진동'과 발음이 비슷한 지명조차 없었어. 다음엔 제보가 가장 많았던 지역인 전북 부안으로 향했어. 마을 한가운데 시냇물이 흐르고, 제보받은 집 근처엔 절도 있어. 그런데 할머니는 잘 모르겠대. 확인해보니 부안염전은 1945년 이후에 생겼어. 연로한 몸으로 전국을 헤매고 다닌 할머니. 시간이 갈수록 애가 타.
그러다 처음부터 유력한 고향으로 언급됐던, 마산 진동에 갔어. 그곳에 가자 할머니 눈빛이 달라져. 바닷가도 가보고, 마을 앞산 절에도 올랐어. 할머니 눈이 촉촉해져. 기억이 난 거야.
그런데 이 마을에 할머니 가족은 없어. 많은 방송에서 할머니의 사연을 소개했는데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 진동이라는 지역이 혹시 이북이거나, 6.25 전쟁을 겪으며 가족이 몰살당했거나, 이민을 갔을 수도 있어.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시간은 흐르고, 할머니 비자 만료일도 다가와.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걸까. 기댈 수 있는 건 단 한가지, 할머니의 기억이야. 사실, 할머니가 떠올린 고향의 모습에 결정적인 단서가 있었어. 바로 '집 마당의 큰 솥'이야. 우리나라에서 당시 마당에 큰 솥이 있는 집은 흔한데, 왜 이게 결정적인 단서가 됐을까?
▲ 마지막 퍼즐 조각
훈 할머니의 한국 일정 중에 기억을 찾기 위해 민속촌을 방문했었는데, 거기서 할머니는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던 어릴 적 기억, 어머니가 간장과 김치 같은 걸 넣어두던 장독대의 풍경, 밥을 짓던 부엌의 솥을 만져보며 행복해 했어. 마치 17세 소녀로 다시 돌아간 듯. 그러면서 할머니가 했던 말이 있어.
"아버지가 마을 남자들 몇 명하고 솥에 엿을 만들어서 팔았어요."
엿을 만들어 팔았다는 것. 결정적인 정보인데, 당시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어. 단 한사람만 빼고.
"'마당에 엿을 고는 커다란 솥이 있었다' 그게 결정적인 기억이었죠. 그래서 진동면으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죠. 노인정에 음료수 박스를 사들고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앉아 계시는데 이제 일일이 어르신들에게 그걸 물었죠. 탐문 취재 결과, 엿 공장을 했거나 엿장수를 했던 집이 다섯 군데 정도가 나왔어요."
-김주완, 당시 사회부 기자
김 기자는 바로 면사무소로 가서 다섯 집의 호적부와 제적부를 확인했어.
"최종적으로 한 집이 유력한 집으로 남은 거죠. 그 집이 언니가 한 명 있었고, 둘째 딸이 행방불명이고 남동생도 있고 여동생도 있고. 그게 딱 일치하는 거죠. 이 집이 가장 유력하다. 가슴이 좀 떨렸죠."
-김주완, 당시 사회부 기자
이런 가족이 있었어. 이성호-장점이 부부 가족이야. 장녀 이덕이, 셋째이자 장남 이태숙, 그리고 막내 이순이. 행방불명된 둘째딸, 이름은…
'이남이'였어. '나미'와 발음이 비슷해. 김 기자는 이남이의 가족을 수소문했어. 그런데 부모님과 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남동생도 5년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야. 유일하게 살아있는 가족은, 막내 이순이. 경남 합천에 살고 계신대. 김 기자는 한달음에 순이 할머니를 찾아갔어.
"제가 훈 할머니 얼굴 사진을 좀 크게 확대를 해서 들고 갔었거든요. 이순이 할머니한테 사진을 드리면서 '혹시 할머니 이분 좀 알겠습니까?' 이렇게 딱 물었더니, 지금도 제가 좀 울컥한데… 할머니가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사진을 끌어안고 막 '언니' 하면서 우는 거예요. 핏줄이라는 게 뭔가 그런 게 있나 봐요. 50년이 지났는데, 사진 한 장 보고 그렇게 알아본다는 게…"
-김주완, 당시 사회부 기자
순이 할머니가 사는 곳은 완전 시골 깡촌이었대. 그래서 방송도 뉴스도 한 번도 못 본거야. 그런데 김 기자가 내민 사진을 보는 순간 느낌이 확, 온 거야. 김 기자가 보기에도 훈 할머니와 순이 할머니가 꼭 닮았더래.
순이 할머니는 곧바로 훈 할머니를 만나러 길을 나섰어. 훈 할머니는 한국에서의 실망스러운 여정 끝에 기력을 잃고 병원에 입원 중이셨어.
"우리 언니 맞네. 언니 고생 많이 했어.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났어."
"감사합니다. 이제 뭘 더 하고 싶겠어요. 가족을 만났는데."
두 분은 만나자마자, 서로 언니와 동생임을 확신했어. 하지만 기뻐하기엔 좀 일러. 훈 할머니가 집을 떠났을 때 순이 할머니는 고작 5~6살이었거든. 유전자 검사를 해보기로 했어.
"'검사 결과가 어땠어요?' 하니까, '맞다'라고, 일치한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제일 먼저 나던 게 아버님 생각이죠. 제가 만나는 게 아니고 아버님이 고모님을 만나야 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생각이 났죠."
-이상윤, 이순이 할머니 장조카
훈 할머니와 순이 할머니는 자매 사이가 맞았어. 무려 55년 만에 만난 자매. 훈 할머니, 아니 '이남이' 할머니는 그토록 간절히 그리워한 가족을 찾은 거야.
▲ 되찾은 이름, 이남이
이성호, 장점이 씨네 둘째 딸 이남이. '인천 이씨' 집안이야. 다다쿠마는 본관을 고향으로 잘못 이해한 거야. 엿을 고아 팔며 고물장사를 하는 아버지, 보따리 방물 장사를 했던 어머니. 집 마당 한가운데는 엿을 고는 시커먼 가마솥이 있었어. 아버지는 유난히 둘째딸 남이를 예뻐했어. 남이는 바로 아래 남동생을 제일 좋아했어. 말수가 적고 얌전했던 남동생은 남이를 잘 따랐대. 해방 후에 일본군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왔지만, 어디에서도 남이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던 거야. 시간이 갈수록 딸이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려야 했어. 아버지, 어머니는 결국 남이의 소식을 알지 못한채 눈을 감으셨어. 남동생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누나를 찾으려고 전국을 헤매고 다녔대. 그렇게 평생 누나를 그리워하다, 훈 할머니가 귀국하기 5년 전, 세상을 떠나셨어.
아버지 묘소를 찾은 남이 할머니. 평생을 기다린 아버지와의 만남. 속절없는 그리움에 흐르는 눈물. 17살 소녀가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돼서 돌아왔어.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 받을 수 없는 시간이야.
한국의 가족을 찾고 얼마 후, 이남이 할머니에겐 이게 생겼어.
주민등록증. 1924년 3월 2일생 이남이. 대한민국 국민 이남이. 할머니는 한국에서 지내기로 영구 귀국을 결정했어. 하지만 마음과 달리 한국 생활은 쉽지 않았어.
"의사소통이 안 됐던 게 할머님이 제일 크게 힘들어하신 것 같고, 가끔 한번씩 보면 얼굴이 좀 어두워 보일 때도 있었어요. 평생을 캄보디아에서 살다 보니까 캄보디아의 가족 생각들을 되게 많이 하시더라고요."
-이상윤, 이남이 할머니 장조카
결국 할머니는 캄보디아의 가족 곁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2001년 2월 15일, 할머니의 마지막 소식이 들려왔어.
이남이 할머니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쥐띠 남자로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다. 다른 곳에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겼대. 그 말에는, 남자로 태어나서, 그런 끔찍한 일을 안 겪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이 담겼어.
남이 할머니의 어릴 적 모습은 어땠을까. 이런 상상을 해봐.
바다가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마을. 엄마의 손을 잡고 마을 앞산을 오르던 17세 소녀 남이. 산 중턱 절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면 뒤에서 어머니가 "남이야, 누구 닮아 이리 빠르노. 우리 저 나무에서 좀 쉬었다 가자"라고 말해. 집으로 돌아오자, 아빠 목소리가 들려. "아이고 우리 남이 왔나. 우리 예쁜 딸, 엿 한 번 먹어봐라"라며 정성스럽게 만든 엿을 건네. 마루에 앉아 있던 남동생이 얼른 누나 곁으로 달려와. "누나야, 우리 바닷가 가자"며 매달려. 나풀나풀 열일곱 소녀는, 나비처럼 진동마을 곳곳을 뛰어다녀. 가난했지만 행복했어.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아닌, 소녀 남이는.
하나코도, 훈이도, 아닌 예쁜 둘째딸 남이.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죄로, 가족과 떨어져 이국땅에 버려졌던 여자 남이.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의 나라 말은 잊었지만, 이름 두 글자와 추억은 잊지 않았어. 평범한 삶은 빼앗겼지만, 평생토록 그 고운 성품은 잃지 않았어.
"할머니는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우리 어머니를 정말 아끼셨고, 손주들도 사랑하셨죠."
-짠니, 남이 할머니 셋째 손녀
"할머니는 정말 행복하셨어요. 가족을 만나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하셨어요."
-싯나, 남이 할머니 첫째 손녀
이제 남이 할머니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났을까. 그곳에선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기를. 이곳에서의 모든 고통을 다 잊고 마음 편히 웃고 계시길.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사실 해방 후에도 한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문제야. 용기를 내 세상 밖으로 나와 증언해준 할머니들 덕분에, 해방 50년이 되어서야 알려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훈 할머니 사연 덕에 더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를 잘 알게 됐어. 또 훈 할머니 사연 이후에 알려졌는데, 중국에 끌려간 위안부 중에도 한국에 못 돌아온 또 다른 할머니가 있었어. 아직도 제2, 3의 훈 할머니가 곳곳에 남아있을 거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야.
2023년 12월 현재, 아홉 분의 위안부 피해자가 살아계셔. '인간의 존엄성'이란 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존재 가치가 있으며 그 인격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지. 그분들의 고통, 잘못에 대한 인정,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은 그 마음. 그분들의 존엄성을, 우리부터 절대로 잊지 말고 기억했으면 좋겠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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