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죽으면 마주해야 할 질문

한겨레 2023. 12. 2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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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김용규의 숲과 지혜]

픽사베이

진정 소중한 것들과 함께

우리가 죽으면 마주해야 할 질문

강연 자리에서 가끔 청중들에게 던져보는 질문이 있다. “여러분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고 믿으시나요, 없다고 믿으시나요?” 연령대에 따라, 성별에 따라, 직업과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략 7:2:1 비율로 삶은 죽음을 통해 완전히 멈추고 끝나버릴 걸로 믿는 사람들이 우세하다. 약 10% 정도만이 답을 유보한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나는 저 질문에 대해 어느 쪽이든 확신에 찬 대답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어떻게 저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어느 쪽이든 확신을 늦추고 이런 상상을 해보자. ‘혹시라도 죽음이 하나의 문(門)이라면? 그래서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새로운 세계와 대면해야 한다면?’ 단테는 ‘신곡’에서 그 문을 들어선 존재가 어떻게 되는지 위대한 상상력을 펼치며 웅혼한 서사시로 그려내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요 의사로 오랜 기간 재직했던 정현채 선생은 이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답을 책으로 펴냈다.(정현채,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비아북) 1300여 년 전 단테가 쓴 ‘신곡’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위대한 문학 작품이라면, 정현채 선생의 책은 ‘죽음학’이라는 이름을 단 과학서에 가깝다. 그의 책은 저명한 의학 저널인 ‘랜싯(Lancet)’은 물론, 다양한 의과학 전문학술지에 게재된 근사체험(近死體驗, NDF, Near-Death Experience)을 바탕으로 한 논문에 주로 근거하고 있다.(근사체험의 개요에 관한 탁월한 정리는 최준식, ‘근사체험이란 무엇인가’, ‘불교평론’, 2023. 11 참조)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 나는, 혹은 했더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다만 확신을 유보하고 더러 상상해 볼 뿐이다. 자, 확신의 고삐를 늦추고 우리 함께 이런 상상을 해보자. ‘혹시라도 우리가 생을 마친 후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면, 정말 그렇다면, 그때 우리는 새로 들어선 그 문 앞에서 애초에 나에게 태어날 기회를 준 어떤 존재로부터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상상 말이다.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아래 두 문장이다.

Have you lived enough? (너는 충분히 살다 왔느냐?)

Have you ( ) enough? (너는 충분히 ( ) 왔느냐?)

(영어 문장은 Mary Oliver(1935~2019)의 시, ‘The gardener’의 첫 두 문장에서 빌림. 주어를 ‘I’에서 ‘You’로 바꿨음)

두 번째 문장에 동사 부분을 괄호를 쳐 비워둔 이유는 당신이 그 속에 어떤 단어가 들어가면 좋을지 생각해 보길 바라서다. 아마도 당신이 떠올린 대답 안에 당신 삶의 궁극적 지향이 담겨 있을 것이다. 예컨대 돈을 삶의 최대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이라면 ‘(벌고)’ 또는 ‘(쓰고)’를 넣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다운 삶, 좋은 삶을 향해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내가 의도한 동사를 떠올리고 있겠지만, 그 단어는 다음 편 글에서 공개할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라. 여기서는 우선 첫 번째 질문, 충분히 산다는 것에 집중하기로 하자.

삶의 또 다른 차원

충분히 살다 왔느냐는 질문이 몇 살까지, 얼마나 장수하고 왔느냐 묻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점은 모두 알 것이다. 저 질문은 ‘인간으로서 살아볼 수 있는 삶의 여러 차원, 혹은 가능성 중 어디까지 살아봤는지’를 묻는 말이다. 연재 전체의 서론 부분에 해당하는 앞의 글에서 나는 냉이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을 조망했다. 우리가 냉이를 대하는 다양한 시선을 하나의 사례로 삼은 뒤, 우리가 삶의 다른 영역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다른 시선으로 만날 수 있는지를 살폈다. 예전 글에서 제시했던 표를 다시 보자. 그때 물음표로 남겨두었던 빈칸을 결론 부분의 글에서 채우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사람이 가져볼 수 있는 시선을 문장으로 풀어 빈칸을 채워본다.

당신이 마주한 밥상 앞에서 더 자주 감사와 평화를 느끼면 좋겠다. 일을 위해 집을 나서는 당신 발걸음에 설렘이 가득 차오르면 좋겠다. 그 일을 할 때 당신의 삶이 막 꽃피는 느낌이면 좋겠다. 사랑하는 자식이 당신 삶에 있어 가장 가까운 스승이기도 했으면 좋겠다. 당신의 자녀를 자신만의 세계를 품고 자신만의 궤도와 리듬으로 삶을 펼쳐나가는 별이거나 우주로 여길 수도 있으면 좋겠다. 당신이 그 누군가와 몸으로 사랑을 나눌 때, 때로 서로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악기처럼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를 정성스레 연주하여 한 곡의 아름다운 노래를 완성하는 감동과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지점, 그것은 더없는 위로, 그것은 가장 정성스러운 치유, 당신의 사랑이 그 지점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오직 이성이 지배하는 유무 분별이나, 심판권을 틀어쥔 존재로만 신을 만나지 않기를. 가장 밑바닥에 살면서 종종 짓밟힌 상처 품어 끝내 이기고 마침내 피어나는 ‘땅빈대’의 꽃송이에서도, 절벽에 매달려 피는 분홍 진달래에서도,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저녁노을에서도, 이따금 누군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한줄기에서도 당신은 신의 입김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손길이 닿기를 원하는 병들고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의 눈물과 울분 앞에서 쪼그라든 마음으로 머뭇거리고 있는 나를 다정하게 응시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의 시선과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레벨과 차원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저렇게 표현해 보았다. 물음표가 있는 부분을 저 글이 묘사하는 것처럼 채워 넣고 그렇게 만나는 상상을 해보라. 어떤가? 더 따뜻하고 더 풍요롭지 않은가? 더 소중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나는 이것을 우리 ‘삶이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이라고 부른다. 차원(dimension)은 수준(level)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눈곱만큼 작은 집개미로부터 날개가 있는 커다란 개미까지 그 크기나 활동 공간을 기준으로 개미들의 수준(레벨)을 측정할 수 있지만 개미는 개미일 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개미는 참새가 보는 세계를 볼 수 없다. 개미와 참새는 평생 다른 차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치는 참새보다 높이 나는 새다. 그래서 어치가 참새보다 수준이 더 높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을 오가는 철새들의 세계는 모른다. 철새가 아무리 높은 레벨이어도 한 번에 구만리를 날아올라 여섯 달을 비행하는 대붕(大鵬)의 세계(‘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 참조)는 모를 것이다. 차원은 그런 것이다.

삶의 차원들

인간이 살아볼 수 있는 삶에도 차원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 삶의 차원을 나는 네 가지로 개념화하여 바라본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차원 중 어느 차원에 머무느냐에 따라 자신이 자주 느끼게 되는 주된 감정 상태도 매우 다르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뒤 간략히 설명해 보겠다. 물론 딱 하나의 차원에만 머물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어느 정도 다른 차원에 맞물려 살기도 하고 순간순간 다른 차원에 접속하기도 하지만, 그의 삶이 머무는 주된 차원은 따로 있다.

① 차원 하나, 생존

하나의 차원은 생존(生存)이다. 생존의 차원에 머물러 사는 인생은 주로 먹고살기 위한 삶, 살아남기 위한 삶을 생의 지향으로 삼고 있다. 겨우겨우 먹고 사는 수준으로부터 대대손손 먹고살고도 남는 수준까지, 이들이 머무는 생존의 차원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 그 수준을 고저(高低)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행위의 근원적인 동력은 모두 같다. 바로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것과 한 쌍을 이루는 탐욕이다. 무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두려움이 제대로 된 돌봄도 받지 못하고, 변변한 알아차림의 기회도 얻지 못하여 그이의 삶 대부분을 지배하는 인생이다. 이 차원에 머물 때 그 사람에게 세계는 매우 단순한 구도로 이해된다. 나에게 이로울까 해로울까, 유리할까 불리할까, 나보다 셀까 약할까…. 생존 본능이 이끄는 이 이분법적 판단이 그의 인식과 태도를 확고히 지배하게 된다. 그 결과 이들은 그림에 나열해 둔 감정 상태의 이것저것을 수시로 오가며 머물게 된다. 어떤 때는 승리감과 우월감에 젖고, 다른 어떤 때는 패배감과 열등감에 젖는다. 그리고 자주 타자에 대한 원망과 적대감, 혹은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쾌(快)는 감각적인 쾌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계의 공동 창조자로 살 때 느끼게 되는 근원적인 기쁨을 만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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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원에 주로 머무는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생존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과 곤란한 상황들을 진지하게 바라봐야 한다.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자기 삶을 개선할 수 있을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생존에 필요한 공부만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인생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물론 생존은 모든 생명의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추구다. 따라서 생존을 추구하는 본능을 발현하며 사는 것은 인간에게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차원이 우리가 살아볼 수 있는 삶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라고 여기며 사는 인생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 지배받는 이라면 그가 얼마나 확실하게 생존 기반을 구축했든 그의 인생은 지극히 가난한 생이 될 것이다. “너는 충분히 살다 왔느냐?”는 질문에 아마도 가장 빈약한 대답을 내놓게 될 인생은 아마 평생 이 차원을 살다가 떠나는 삶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타인의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자신의 배와 곳간을 채우다가 떠나게 된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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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차원 둘, 충만한 삶

또 하나의 차원은 충만(充滿)이다. 충만하게 사는 인생은 그 삶이 훨씬 풍성하다. 이들은 더 많은 세계와 접촉할 기회를 만들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소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영화와 연극, 그림과 음악, 뮤지컬과 오페라 등을 즐기고, 아름다운 풍광과 공간, 이야기를 찾기 위해 자주 여행하며 살 것이다. 이들은 그 속에서 더 자주 감탄하고 때로 신비와 만나기도 한다. 그들은 그렇게 자주 심미적 쾌감을 누리며 즐겁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자기 삶을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그 재료들로부터 멀어지거나 격리되면 그는 곧바로 쓸쓸하고 우울해진다. 그런 상태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양한 금단 증상을 겪기도 한다. 충만함을 창조적인 활동이 아닌 주로 소비하는 활동을 통해 조달할 때 찾아오는 현상이다. 만약 그런 상태를 자주 겪는다면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내가 혹시 심미적 쾌감에 중독된 게 아닐까? 조금 전까지 차올랐던 감정이 혹시 전제 조건이 갖춰져야만 차오르는 충만감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충만감은 ‘텅 빈 충만’이다. 이 충만감은 신 또는 천지자연과 내가 하나로 정렬되었을 때 찾아오는 충만감이다. 도달하기 어려워 그렇지, 만나면 더 깊은 충만을 느낄 순 있다. 구석구석 방을 치우고 쓸고 닦은 뒤 창문을 활짝 열어 방안으로 시원한 바람을 초대한 뒤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글쓰기에 푹 빠졌을 때, 혹은 고요히 기도하거나 깊이 묵상하다가, 아니면 지하철을 기다리며 역(驛)의 스크린에 적힌 시 한 편을 우연히 읽다가, 지는 노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공원을 느릿느릿 걷다가, 재잘대는 아이들의 수다를 미소와 함께 듣다가, 집 앞에 쌓인 눈을 따뜻한 마음으로 치우다가… 특별할 것도 없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마음의 차오름. 우리 삶이 그런 충만함을 늘 데리고 다닐 때, 그 사람은 “너는 충분히 살다 왔느냐?”는 질문에 조금 더 풍성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김용규(충북 괴산, 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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