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결점'의 기계공학 vs '속도'의 컴공···남양연구소가 술렁이는 이유 [biz-플러스]
현대차그룹 연구개발 중심 SW로 이동
그룹 성장 기여해온 엔지니어링 연구진
누적된 불만 폭발···갈등 조정 실패 책임
기대한 SDV 관련 SW 개발도 속도 못내
현대차(005380)그룹의 연구·개발(R&D) 메카인 남양연구소가 술렁이고 있다. 그룹 수뇌부가 지난 28일 R&D 조직을 전면 개편하겠다고 밝힌 것과 동시에 연구소 수장인 김용화 기술총괄책임자(CTO·사장)가 취임 6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급변하는 글로벌 모빌리티 시장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전사의 미래 모빌리티 연구개발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그룹 안팎에서는 이번 인사에 대해 ‘이례적’이란 반응이 잇따르고 있다. 더욱이 김 CTO의 퇴임 소식은 그룹의 공식 발표 바로 전날 저녁에 연구소 직원들에게도 알려진 것으로 전해졌다. 조직 수장을 잃고, 대대적인 조직 개편까지 앞둔 남양연구소는 1995년 창립 이래 가장 추운 겨울을 맞닥뜨리게 됐다. 도대체 남양연구소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28일 오전 현대차그룹은 예정에 없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현대차·기아(000270), 미래 모빌리티 R&D 역량 결집 위한 조직 개편 추진’이란 제목의 짤막한 내용의 자료였지만 파괴력은 컸다. R&D 조직을 개편한지 불과 6개월 만에 또다시 R&D 조직의 대수술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직 수장인 김용화 CTO가 고문으로 위촉돼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이었다.
김 CTO는 2015년 현대차 파워트레인제어 개발실 상무로 현대차에 합류해 지난 4월 퇴임한 박정국 연구개발본부장 사장의 뒤를 이어 남양연구소를 맡았다. 이어 지난 6월엔 부사장에서 연구개발 조직을 총괄하는 CTO 사장으로 승진했다. 현대차그룹은 김 사장의 CTO 취임에 맞춰 조직을 대대적으로 바꿨다. 기존의 엔진·변속기 등 하드웨어 중심의 개발에서 차량 소프트웨어와 배터리·로봇 등을 독립형 개발조직으로 바꾼 게 핵심이었다.
실제 R&D 부문을 총괄하는 김 CTO 산하에는 △제품통합개발(TVD) 본부 △차량소프트웨어(SW)담당 △모빌리티 에너지 전환 연구(META) 담당 △독립형 개발조직(배터리, 로보틱스, 수소연료전지, 상용)·디자인센터 등 각 부문을 독자적인 개발 체계를 갖춘 조직으로 재편했다. 당시 현대차그룹은 “협업이 필요한 경우에는 각 조직들이 필요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면서 스타트업처럼 유연하게 연구개발을 수행할 것”이라며 “이를 기반으로 현대차·기아는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나아가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김 CTO는 R&D 개발의 전권을 맡은지 반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룹 안팎에서는 그룹 수뇌부가 그의 퇴임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상 경질이란 얘기다. 김 CTO 체제로는 전동화·SDV 전환 등 미래차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SW 분야의 개발에 속도를 내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1995년 남양연구소 설립 이후 R&D 조직의 헤게모니는 엔진·변속기 등 내연기관 차량 개발을 담당해온 ‘기계공학' 출신들이 쥐어왔다. 기계공학도들은 현대차그룹의 성장에도 기여했다. 기계과 출신들은 차량이 완성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시험과정을 거쳐 결함을 제로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때 ‘바퀴 달린 냉장고’라며 혹평을 받았던 현대차·기아의 품질이 이제는 글로벌 완성차 회사들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데는 ‘무결점’을 추구하는 기계공학 출신 연구원들의 공이 컸다.
문제는 이같은 연구개발 스타일이 유연한 대응이 필요한 미래차 개발과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대차그룹은 올 초 신년사에서 “2025년까지 모든 차종을 SDV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SDV는 말 그대로 소프트웨어가 중심인 자동차다. 현대차그룹은 SDV가 전기차·자율주행차 등 미래 모빌리티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반 차량엔 반도체가 300~400개 탑재되지만 SDV엔 최소 2000개 이상의 반도체가 탑재된다. 이를 위해 현대차·기아는 최근 수년간 자율주행 기술 기업인 포티투닷(42dot)을 인수·합병했고 SW·반도체 관련 인력 수백명을 채용하면서 체질 개선을 시도해왔다. 이런 SW 중심의 개발은 컴퓨터공학·전자공학 등 비기계공학 출신들이 강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들은 무결점을 추구하는 기계공학과 출신들과도 일하는 방식도 다르다. 제품이 제 기능을 하기만 하면 작은 오류는 있을 수 있고, 수시로 업데이트만 하면 충분하다는 게 기본 인식이다.
그룹 안팎에선 그룹의 연구 중심이 SW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수면 아래에 있던 조직 내 갈등이 밖으로 분출되자 그룹 수뇌부가 수습에 나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기계공학으로 대변되는 하드웨어 연구진과 컴퓨터공학·전자공학 등으로 대표되는 소프트웨어 연구진들의 화학적 결합을 이뤄내지 못했고, 그룹 수뇌부가 김 CTO에게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실상 경질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기아가 올해 사상 최대인 25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내는데는 내연기관차가 큰 역할을 했지만, 대외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은 전기차, SDV, 자율주행 등 미래 모빌리티였다”면서 “엔진·변속기 등 하드웨어 연구진들 사이에선 회사의 성장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데도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꽤 오래 쌓여온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수익은 내연기관·하이브리드 차에서 나오는데 그룹 내에서 지출만 많은 SW 인력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얘기다.
R&D 리더십 이원화에 대한 지적도 있다. 그동안 소프트웨어 개발 조직은 김 CTO장과 송창현 포티투닷 대표 겸 현대차 SDV본부장(사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는 일관된 전략 부족과 연구개발 속도 저하로 이어졌다. 그룹 수뇌부는 이런 요소가 그룹 전체의 경쟁력을 해치기 전에 연구 조직을 새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직개편 추진과 관련해 현대차그룹도 “조직 분산 및 리더십 이원화로 인해 발생하는 혁신 전략의 일관성 부족, 협업 체계의 복잡성 등이 연구개발 속도를 저하시켰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선 이번 일을 계기로 현대차그룹의 R&D 조직이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더 속도를 낼 것이란 전망한다. 다만 오랜 기간 누적된 기계공학 출신의 하드웨어 연구진들의 불만을 어떻게 해소할지도 관심 거리다. 업계 관계자는 “미래차 대응을 위해선 SW 중심의 개발 능력을 키우는 것이 맞지만 탄탄한 엔지니어링 기술은 자동차 회사의 근간”이라면서 “다음달 3일 그룹 신년회에서 정 회장이 던질 메시지에 따라 향후 그룹의 R&D 개편 방향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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