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배우 이선균이 남긴 '인생작'들…24년의 연기 발자취

김지혜 2023. 12. 2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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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이선균이 48년의 생을 마감했다. 예상치 못했던 이른 죽음이다. 단 몇 개월 사이에 불거진 혐의와 논란과 가십은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버거웠던 것 같다.

누구도 그 고통을 예측할 수는 없으리라. 떠나간 자는 말이 없고, 남겨진 자는 눈물을 흘릴 뿐이다. 한 명의 미약하고 부족한 언론인으로서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한 고인에게 부채감을 느낀다.

이선균을 근거리에서 지켜본 이들은 저마다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인을 추모했다. 장례식장은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이틀 간의 조문이 이뤄졌고, 오늘(29일) 가족과 친지들의 배웅 속에 이선균은 영면에 든다. 모욕과 조롱, 비아냥이 없는 그곳에서 평안에 이르기를 기원한다.

연예인의 죽음, 대중의 관점에선 명백히 '남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창작물을 어떤 식으로든 소비했기에 단순히 '남의 일'로 만 여겨지지 않는다. 지난 24년간 TV와 영화를 통해 대중의 폭넓은 신뢰와 사랑을 받아온 스타였지 않은가. 고인을 추모하는 방법은 그가 남긴 작품들을 기억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선균의 연기는 화려하지는 않았다. 연기는 독주가 아닌 앙상블이라는 것을 잘 안 이선균은 자신보다 파트너를 더 빛나게 해준 배우이기도 했다. '파주'의 서우, '화차' 김민희,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임수정, '우리 선희'·'잠'의 정유미, '킹메이커'의 설경구, '킬링 로맨스'의 이하늬 등 이선균과 호흡을 맞춘 이들은 어느 때보다 빛났다. 

앞선 세대의 배우들이 '메소드 연기'로 일가를 이룬 것과 달리 이선균은 본인의 개성을 투영한 캐릭터 연기와 연기인지 실제일지 구분이 안 가는 일상적인 연기로 친근한 매력을 발산했다. 또한 장르, 영화의 규모, 역할의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감독이 원하는 캐릭터와 연기를 구현해 냈다.

48년의 인생에서 24년을 '대중 배우'로 산 그는 다작 배우였다. 지치지 않은 열정으로 42편의 영화와 28편의 드라마를 남겼다. 그는 몇 해 전 인터뷰에서 인생작 세 편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커피프린스 1호점'과 '나의 아저씨', '기생충'을 언급한 바 있다.

대중의 생각은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필모그래피는 폭넓고 다양했다.

◆ '커피프린스 1호점', 서브 남주 신화의 시작

이선균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1기 졸업생이다. 1999년 비쥬의 '괜찮아' 뮤직비디오로 연예계에 입문했으며, 연기 데뷔는 2001년 MBC 시트콤 '연인들'로 이뤄졌다.

이후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 조, 단역을 하며 짧지 않은 무명 생활을 보냈다. 이선균이 대중들의 마음에 파고든 건 2007년부터다. 긴 무명의 터널을 드라마 두 편의 연속 성공으로 뚫었다.

2007년 1월에 방영된 '하얀 거탑'이 방송 초부터 인기몰이를 하며 이선균의 존재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 올바른 직업윤리를 가진 올곧은 의사 최도영으로 분해 안정감 있는 연기를 펼쳤다. '하얀 거탑'은 방송 내내 시청률 20% 대를 유지했으며, 최종회 시청률 32%를 찍으며 역대 의학 드라마 중 최고의 인기와 완성도를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 해 여름, 이선균은 또 한 편의 히트작을 낸다. 10~20대 시청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커피프린스 1호점'이다. 2005년 '베스트극장 - 태릉선수촌'으로 인연을 맺은 이윤정 PD가 메가폰을 받은 작품으로 이선균에게 또 한 번의 결정적인 기회가 주어졌다. 최한결(공유)의 사촌형이자 방송음악가인 최한성으로 분해 젠틀한 매력을 뽐냈다.

한성이 재회한 여자친구 유주(채정안)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전화로 '바다여행'을 불러주는 장면은 '커피프린스 1호점'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이선균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와 따뜻한 감성이 빛을 발하며 여성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멜로드라마에서 서브 남자 주인공은 메인 남자 주인공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무매력의 인물로 설정되곤 했지만 이선균은 자신의 역량과 매력으로 서브 남주의 신화를 써 내려갔다.

이선균 역시 '커피프린스 1호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2020년 방송된 MBC 다큐플렉스 '청춘다큐 다시 스물 - 커피프린스 편'에서 이선균은 "내가 맡은 수많은 배역 이름을 모두 다 기억하기는 힘들지만 최한성은 평생 기억할 것 같다. 너무 고마운 역할이다. 어쩌면 나의 마지막 청춘 드라마"라며 캐릭터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 '옥희의 영화', 홍상수 월드에서 유독 빛난 일상 연기

드라마 두 편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선균은 인기에 취한 행보만을 쫓지 않았다. 흥행 코드가 확실한 상업 영화에 잇따라 캐스팅 됐지만 감독의 개성이 뚜렷한 저예산 영화에도 눈을 돌렸다. 특히 2010년대에는 홍상수 감독과 여러 작품을 하며 '홍상수 월드'에 자신의 인장을 새겼다.

이선균은 홍상수 감독과 2008년 '밤과 낮'을 시작으로 2009년 '어떤 방문: 첩첩산중', 2010년 '옥희의 영화', 2013년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우리 선희'까지 총 5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인연의 시작인 '밤과 낮'은 이선균이 '하얀 거탑'과 '커피프린스 1호점'의 연속 흥행으로 스타덤에 오른 다음 해 이뤄진 출연이다. 드라마와 광고 섭외가 줄을 이을 때 홍상수 감독과의 인연에 물꼬를 튼 것이다.

그중 세 번째 협업인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연출 세계가 한 단계 진화했다는 평가를 받은 수작이었다. '주문을 외울 날', '키스 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라는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영화로 세 명의 중심인물이 다른 역할로 얽히고설키는 독특한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이선균은 영화 강사, 영화과 학생 진구로 분해 종전의 젠틀한 이미지와는 다른 지질한 남성의 웃픈 자화상을 보여줬다.

이선균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는 개성이자 핸디캡이었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매력적인 '동굴 보이스'지만, 목소리를 안으로 가두는 발성 탓에 발음이 뭉개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독보적인 개성은 핸디캡마저 극복했다.

TV드라마와 상업 영화에서는 다소 전형적인 연기를 보여주곤 했지만 홍상수 영화에서는 일상성이 빛나는 연기를 보여줬다. 배우를 감독의 의도에 가두는 연기 디렉팅 보다는 배우의 개성을 살리는 연출을 추구하는 홍상수 감독과 이선균은 아주 잘 맞는 앙상블이었다.

'옥희의 영화'로 인연을 맺은 정유미와는 2013년 '우리 선희'로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 그리고 10년 후인 2023년 '잠'으로 재회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는 기쁨을 나눴다.

정유미는 '잠'의 기자간담회에서 이선균과의 10년 만의 재회를 반가워하며 "평소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라 늘 동경하고 있었다. 그런 배우와 연기한다는 것 자체도 영광스러웠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이선균이 채워주었다"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 '끝까지 간다', 장르 문법을 깬 영화와 연기

'끝까지 간다'는 2014년 한국 영화의 빛나는 수확 중 하나였다. 2006년 영화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의 실패로 암흑기를 보낸 김성훈 감독이 18년 만에 재기에 성공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중심에 이선균과 조진웅이 있었다.

'끝까지 간다'는 뺑소니를 치고 범행 사실을 은폐한 경찰 고건수가 미스터리한 목격자 박창민의 등장으로 곤경에 빠지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범죄 스릴러다.

좋은 놈과 나쁜 놈의 대결이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깨고 비도덕적인 놈과 나쁜 놈의 대결로 흥미와 긴장을 유발한 작품이다. 또한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장르의 전형성을 탈피한 영리한 작품이었다. 서스펜스와 유머를 겸비한 유려한 연출과 이선균, 조진웅의 개성 강한 나쁜 놈 연기가 어우러지며 340만 흥행에 성공했다.

이 작품에서 이선균은 어머니의 장례식날 뺑소니 사고를 친 후 사건을 은폐하려다 더 큰 위기에 직면하는 비리 형사 고건수를 연기했다. 영화 초반 시체안치실에서 벌어지는 약 10분간의 1인극은 이선균의 연기 역량의 최대치를 보여준 명장면으로 꼽힌다.

영화계에서 역량에 비해 상복이 없었던 이선균은 이 작품으로 2015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조진웅과 함께 공동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 '나의 아저씨', 아저씨의 고독에서 시작된 우리를 향한 위로

다수의 대중은 '배우 이선균' 하면 '나의 아저씨'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의 아저씨'는 삶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는 아저씨 삼형제와 거칠게 살아온 한 여성이 서로를 통해 삶을 치유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2018년 방송된 이 작품의 평균 시청률을 10% 미만이었지만 수치를 능가하는 감동과 울림으로 시청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정서는 '고독'과 '위로'였다. 40~50대 남성 시청자들은 이선균이 연기한 박동훈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중년의 남자가 사회와 가정에서 직면한 위기, 그로 인해 느끼는 삶의 고독과 허무를 이선균은 쓸쓸한 무드와 절제의 감정으로 표현해 내 극찬을 받았다. '나의 아저씨'는 이선균이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특화된 배우라는 고정관념을 깨준 작품이기도 하다.

삶과 사람으로 인해 빚어지는 상처와 고통에 대한 대한 명대사가 넘쳤던 드라마였다. 이선균의 비보를 접한 팬들은 드라마에서 동훈이 지안에게 한 말을 소환하며 고인이 마지막까지 겪었을 심적 고통과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있다.

"다 아무것도 아니아. 쪽팔린 거?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다 아무것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 안 망가져. 행복할 거야. 행복할게"

지안에게 참회의 눈물을 유발하고, 시청자들에게 큰 위로가 됐던 대사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살고 있지만 어딘가는 곪아있으며, 타인의 편견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지만 행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보통 사람임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 '기생충', 한국 영화 그리고 이선균의 화양연화

영화 '기생충'(2019)은 한국 영화 탄생 100주년에 당도한 값진 선물이자 이선균의 화양연화 같은 작품이다. 상류층과 하류층, 두 가족의 만남과 파국을 그린 블랙 코미디 영화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작품상, 그리고 국내에서 '천만 영화' 타이틀까지 거머쥔 한국 영화계의 기념비적인 영화다.

'살인의 추억'을 인생 영화로 꼽을 정도로 봉준호 감독과 그의 영화를 동경해 온 이선균은 데뷔 20년 차에 드디어 거장과 협업할 기회를 잡았다. 봉준호 감독과의 미팅 자리에서 박사장 역할을 하기엔 너무 어려 보인다는 말에 새치 어필을 할 정도로 캐스팅에 적극성을 드러냈다.

'기생충'은 '가난한 사람=선, 부자=악'이라는 클리셰를 깨며 자본주의와 빈부격차에 대한 신랄한 풍자 그리고 살풍경을 복합 장르 형식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이선균이 연기한 박동익은 선과 악으로 규정 지을 수 없는 인물이다. 기택에게는 동경의 인물이자 증오의 대상이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선량한 부자일 뿐이다. 이선균은 부드럽고 젠틀한 이미지, 그 너머의 서늘함까지 그려냈다. 그러면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타포인 '선'과 '냄새'에 대한 함의를 관객이 다층적으로 해석하게끔 이끌었다.

'기생충'은 칸을 넘어 아카데미까지 석권하며 2019년과 2020년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영화였다.

이선균은 지난 10월 진행된 뉴스매거진 시카고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순간을 떠올리며 "그 당시(신인시절)를 생각했을 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을 경험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고, 많은 할리우드 셀럽들에게 박수를 받고.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는 시작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선균은 올해 5월 영화 '잠'과 '탈출: PROJECT SILENCE'('탈출') 두 편으로 칸영화제 초청을 받았다. 두 영화 모두 칸과 인연이 없었던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었다. 작품 자체의 매력도 있었겠으나 '기생충'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선균의 신작이라는 점에도 칸이 주목했음을 알 수 있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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