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균, 그의 편안함을 그리워하고 또 바라며
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2023년 12월 27일, 배우 이선균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48세. 어떤 죽음이든 떠나고 나면 황망하기 그지없는 법인데, 그의 죽음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허망하고 착잡하고 가슴 아프다. 주변은 물론 사회적 분위기도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사망 소식이 들린 직후부터 발인이 있는 오늘까지, 여전히 서글픔을 토해내는 반응을 SNS 및 각종 커뮤니티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죽은 자에게 더 이상 허물을 묻지 않는 게 관습인 한국이지만, 죽기 직전까지 마약 투약 의혹과 사생활 스캔들로 바닥까지 명예가 추락했던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안타까운 추모를 보내는 이유는 뭘까? '사회적 타살'이라 불릴 만큼, 그가 내몰렸던 조리돌림의 과정을 온 나라가 생생하게 지켜봤기 때문에? 그 혐의가 범죄이고 그 스캔들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성질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사적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남겨진 가족들을 위로하는 마음에? 물론 그런 이유들도 있겠다.
가장 큰 이유는 이선균이 만인에게 편안한 배우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열렬하게 좋아하진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한 번쯤 깊은 울림과 웃음을 주었던 배우. 20년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작품에 등장하며 마치 우리가 잘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그래서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편안하게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은 배우. 빼어난 연기로 대중을 전율하게 만든 배우를 꼽으라면 이선균이 첫손에 꼽히지 않을 수 있지만, 편안한 연기로 대중에게 공감과 위로를 선사한 배우를 꼽으라면 이선균 같은 배우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와 그의 작품이 쌓아온 이미지가 실제의 그와 괴리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대중에게 그런 편안한 이미지를 확고히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랬기에 우리는 그의 혐의와 스캔들에 더 크게 실망하고, 그의 추락을 지켜보며 많든 적든 입을 거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선균을 잃고 보니, 그가 보여준 것들이 얼마나 큰 위안이고 위로였던가 느껴진다.
이선균은 처음부터 반짝반짝했던 스타는 아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1기 출신이지만, 당시 한예종은 막 설립된 지라 지금과 같은 명성은 아니었다. 졸업 이후 한동안 백수 생활을 하다가 대중에 얼굴을 알린 건 TV 진출작인 MBC 시트콤 '연인들'(2001). 툭하면 트러블을 일으키는 이윤성의 백수 남동생으로 나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 어쩌라고?"를 내뱉으며 눈도장을 찍었지만 이후로도 한동안 단막극 위주로 활동하며 무명생활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그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인상은 서서히 쌓였다. 후에 이동건, 한지혜 주연의 미니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던 '낭랑 18세'의 원작인 KBS '드라마시티-낭랑 18세'의 권혁준 검사가 그랬고, 찌질한 남자의 정수를 보여줬던 '드라마시티-연애'의 김진구가 그랬고, MBC '베스트극장-태릉선수촌'의 수영 국가대표 선수 이동경이 그랬다. 영화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여러 영화에 단역과 조연으로 얼굴을 비추다 2004년 '알 포인트'의 박재영 하사로 비중 있는 역을 맡았으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진 못했고, '손님은 왕이다'에선 성지루, 명계남, 성현아에 이어 네 번째 롤의 주연이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이선균의 연기 인생에 꽃이 피기 시작한 건 2007년 MBC 드라마 '하얀거탑'부터. 주인공 장준혁(김명민)과는 다른 소신으로 대립하던 따스한 의사의 전형, 그러나 누구보다 장준혁을 인정하는 소화기 내과 조교수 최도영을 맡아 부드럽지만 강인한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같은 해 여름 방영한 '커피프린스 1호점'의 최한성 역은 이선균을 '꿀성대'의 소유자이자 여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훈남으로 각인시켰다. "봉골레 하나!"를 외치는 버럭 기질의 셰프 최현욱으로 분한 2010년작 '파스타', 의사라는 직에 소명의식이 없다가 점차 성장해가는 인턴 이민우로 분한 2012년작 '골든 타임' 등 서른이 넘어 빛을 본 그는 TV에서 숱한 히트작을 냈다. 부드러우면서도 까칠하고, 소년처럼 허당기가 있으면서도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는 인물들이 이선균의 얼굴과 목소리를 입히면서 생생하게 대중의 마음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마흔이 넘으면서 로맨스의 주인공과는 멀어졌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작'이라 찬사를 받는 '나의 아저씨'(2018)를 만나게 된다. 사내 정치와 가정사에 휘둘리는 쓸쓸한 중년이면서도 이지안(아이유)에게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알려주는 '좋은 어른' 박동훈 부장.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꼭 옆에 있었으면 하는 인물로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 부장이 남긴 명대사는 숱하게 많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등 언제고 삶이 피폐할 때면 곱씹어보고 싶은 대사들이 이선균 특유의 목소리로 선연하게 기억에 남는다. "다 아무것도 아니야. 쪽팔린 거?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다 아무것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라며 지안을 감싸며 건네는 말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선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라 이제는 가슴 시리게 들린다.
이선균은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스펙트럼의 역할을 맡으면서도 힘이 들어간 느낌없이 자연스러웠다. 특히 영화에서 그의 보폭은 넓었는데, '연기 변신할 거야!' 하는 식의 무리하는 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대중 또한 그의 너른 행보를 편안히 받아들였다. 미로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의 감정이 부딪치던 멜로 '파주'(2009)부터 발칙한 로맨틱 코미디 '쩨쩨한 로맨스'(2010), 사라진 약혼녀를 찾는 미스터리물 '화차'(2012), 독특한 아내와 역시 독특한 카사노바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보이는 남편으로 분한 코미디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다혈질에 짜증이 넘치는 형사로 분한 범죄 액션물 '끝까지 간다'(2014)와 모든 사건을 직접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왕으로 등장한 사극 코미디 '임금님의 사건수첩'(2017) 등을 종횡무진 오갔다. 그러면서도 '어떤 방문: 첩첩산중'(2009), '옥희의 영화'(2010),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우리 선희'(2013)처럼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세상 찌질하고 갑갑한 지식인 남성에도 찰떡같이 어울렸다.
2019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을 기점으로 이선균의 스펙트럼은 한층 더 넓어졌다. 정치인의 선거를 돕는 그림자 참모 서창대를 연기했던 '킹메이커'(2022)는 그간 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던 인물이었고, 전무후무한 마성의 캐릭터 '조나단 나'로 등장한 '킬링 로맨스'(2023)는 이선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발군의 코미디 연기로 마니아층을 형성한 바 있다. 정유미와 다시금 호흡을 맞추며 긴장감을 높였던 서스펜스물 '잠' 또한 이선균의 다른 모습을 십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잠'과 함께 올해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탈출: PROJECT SILENCE', 조정석과 유재명과 함께 주연을 맡은 '행복의 나라'는 그의 유작으로 남아 대기 중이다.
2020년대 들어 더욱 왕성한 활동으로 전성기임을 증명한 그의 발걸음은 멈췄다. 이제는 그가 남긴 작품들을 곱씹는 수밖에 없다. 이선균의 편안한 연기에 감응했던 지난 시간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그가 편안함에 이르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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