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14만원에 철수…재현된 러시아 ‘몰수의 추억’ [핫이슈]
1991년 12월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정부는 에너지와 광물 등 알짜 공기업들을 민영화했다. 주로 ‘주식담보부 대출(Loans for Shares)’이라는 요상한 이름의 경매를 통해서였다. 방식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정부에 끄나풀이 있는 사람이 민간은행을 세운 뒤 매물로 나온 공기업의 주식을 담보로 잡고 정부에 돈을 빌려준다. 재정난에 처한 러시아 정부는 약속한 기일 내에 변제를 하지 못해 은행은 담보로 잡은 주식을 경매에 부친다. 하지만 입찰에는 유력자들의 참가가 제한되면서 매물은 해당 은행을 소유한 올리가르히(과두재벌) 기업에 떨어진다. 경매 참여를 막기 위해 갑자기 공항을 폐쇄하거나 도로를 막는 등의 꼼수가 저질러졌다. 더욱 황당한 것은 민간은행이 정부에 제공한 대출 상당액이 정부 조세 수입을 은행 계좌에 맡겨둔 돈이라는 것이다. 즉 은행은 공기업 주식을 담보로 잡고, 정부가 위탁해놓은 세입 자금을 다시 정부에 빌려주는 것이다. 결국 은행의 공기업 매입 대금을 사실상 국가가 지불한 셈이 된다. 서방은 이를 두고 ‘세기(世紀)의 도적질’이라고 불렀다. 이런 엉터리 민영화를 통해 높은 가치의 공기업들이 정권과 유착한 인사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이후 2000년부터 푸틴이 집권하면서 멀쩡한 민간 기업들이 정부에 다시 빼앗기는 일이 많아졌다. 2003년 10월 발생한 ‘유코스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대 러시아 최고 부자였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유코스 사장이 횡령과 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회사는 파산했다. 유코스의 핵심 자회사가 법원의 막무가내 파산 절차를 거쳐 국영 석유업체(로스네프티)에 싸게 매각됐다. 또 세무당국은 석유기업 시브네프티를 탈세 혐의로 압박해 회사를 사실상 빼앗아 가스프롬에 넘겼다. 이후 가스프롬은 천연가스와 석유 외에 언론, 엔터테인먼트 등에도 진출해 러시아 최대 기업으로 등극했다.
푸틴 말대로 러시아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에너지 기업에 대한 국유화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초기의 엉성한 민영화나 이후 재국유화 모두 사실상 몰수에 가깝다. 미국 투자가인 빌 브라우더가 쓴 책 ‘적색 수배령’에는 본인이 1990년대 러시아 민영화 과정에 참여해 큰돈을 벌었다가 무일푼으로 쫓겨난 과정이 그려져있다. 브라우더 회사의 세무를 담당했던 변호사 세르게이 마그니츠키는 회사가 납부한 세금을 러시아 관료들이 착복한 사실을 폭로했다가 교도소에서 구타로 숨졌다. 이를 기리기 위해 미국 정부는 ‘마그니츠키 법’을 만들어 관련된 러시아인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입국을 금지시켰다. 브라우더는 “러시아 정부가 겨누는 칼날은 결코 부드럽지 않다”고 썼다.
러시아 당국은 이번에 외국 기업들이 떠나는 것을 보호해줄 필요가 없다며 헐값 매각은 당연한 대가라고 얘기한다. 또 외국 기업을 싸게 샀다며 횡재라고 떠든다. 매각된 자산은 주로 크렘린과 연줄이 있거나 친푸틴 인사들에게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러시아는 이참에 자국산 브랜드를 만들게 됐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스타벅스는 유사한 명칭인 ‘스타스 커피’로, KFC는 예전 러시아 닭고기 체인명인 ‘로스틱스’로 상호를 바꿨다. 1990년 1월 모스크바에 오픈해 ‘자본주의 침투’의 상징이었던 맥도널드가 철수하자 그 자리엔 ‘브쿠스노 이 또치카’라는 새 프랜차이즈 매장이 들어섰다. 맥도널드가 나가도 아무 문제없다는 듯 자국산 햄버거 브랜드를 부리나케 론칭시켜 시민들 불만을 잠재운 것이다.
국내 러시아 전문가들이 “왜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 진출을 안하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현대차 철수 건은 그 답변이 될 수 있다. 해외 투자 시 수익과 비용, 위험 요인 등을 세밀히 따지는 기업 속성상 러시아는 아직 마음껏 진출하기 힘든 나라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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