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14만원에 철수…재현된 러시아 ‘몰수의 추억’ [핫이슈]

김병호 기자(jerome@mk.co.kr) 2023. 12. 2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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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우크라 전쟁 여파에 러시아서 결국 철수 (서울=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 현대차그룹이 러시아 공장 준공 13년 만에 현지 생산을 접고 철수를 결정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에 현지 공장 가동을 중단한 지 1년 9개월 만이다. 옛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 들어 러시아 수출을 시작한 현대차는 2007년 현지 법인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러시아 시장에 진출했고, 2010년 6번째 해외 생산거점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준공, 이듬해인 2011년 현지 생산을 시작했다. 사진은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2023.12.19 [현대차그룹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최근 현대자동차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현지 자동차 딜러회사에 1만 루블(약 14만원)에 매각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앞서 르노(1루블, 약 17원)나 닛산·도요타(1유로, 1400원) 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다. 맥주 기업 하이네켄은 적절한 인수자를 찾았지만 지난 8월 정부가 개입해 단돈 1유로에 넘겨야 했다. 법을 고쳐 매각 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서명을 받도록 해서 비싸게 팔고 나갈 여지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깡패 짓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러시아는 과거에도 자주 그랬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 외국 자산에 대한 막돼먹은 매각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과거 러시아에서 빈번했던 ‘몰수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1991년 12월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정부는 에너지와 광물 등 알짜 공기업들을 민영화했다. 주로 ‘주식담보부 대출(Loans for Shares)’이라는 요상한 이름의 경매를 통해서였다. 방식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정부에 끄나풀이 있는 사람이 민간은행을 세운 뒤 매물로 나온 공기업의 주식을 담보로 잡고 정부에 돈을 빌려준다. 재정난에 처한 러시아 정부는 약속한 기일 내에 변제를 하지 못해 은행은 담보로 잡은 주식을 경매에 부친다. 하지만 입찰에는 유력자들의 참가가 제한되면서 매물은 해당 은행을 소유한 올리가르히(과두재벌) 기업에 떨어진다. 경매 참여를 막기 위해 갑자기 공항을 폐쇄하거나 도로를 막는 등의 꼼수가 저질러졌다. 더욱 황당한 것은 민간은행이 정부에 제공한 대출 상당액이 정부 조세 수입을 은행 계좌에 맡겨둔 돈이라는 것이다. 즉 은행은 공기업 주식을 담보로 잡고, 정부가 위탁해놓은 세입 자금을 다시 정부에 빌려주는 것이다. 결국 은행의 공기업 매입 대금을 사실상 국가가 지불한 셈이 된다. 서방은 이를 두고 ‘세기(世紀)의 도적질’이라고 불렀다. 이런 엉터리 민영화를 통해 높은 가치의 공기업들이 정권과 유착한 인사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이후 2000년부터 푸틴이 집권하면서 멀쩡한 민간 기업들이 정부에 다시 빼앗기는 일이 많아졌다. 2003년 10월 발생한 ‘유코스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대 러시아 최고 부자였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유코스 사장이 횡령과 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회사는 파산했다. 유코스의 핵심 자회사가 법원의 막무가내 파산 절차를 거쳐 국영 석유업체(로스네프티)에 싸게 매각됐다. 또 세무당국은 석유기업 시브네프티를 탈세 혐의로 압박해 회사를 사실상 빼앗아 가스프롬에 넘겼다. 이후 가스프롬은 천연가스와 석유 외에 언론, 엔터테인먼트 등에도 진출해 러시아 최대 기업으로 등극했다.

푸틴 말대로 러시아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에너지 기업에 대한 국유화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초기의 엉성한 민영화나 이후 재국유화 모두 사실상 몰수에 가깝다. 미국 투자가인 빌 브라우더가 쓴 책 ‘적색 수배령’에는 본인이 1990년대 러시아 민영화 과정에 참여해 큰돈을 벌었다가 무일푼으로 쫓겨난 과정이 그려져있다. 브라우더 회사의 세무를 담당했던 변호사 세르게이 마그니츠키는 회사가 납부한 세금을 러시아 관료들이 착복한 사실을 폭로했다가 교도소에서 구타로 숨졌다. 이를 기리기 위해 미국 정부는 ‘마그니츠키 법’을 만들어 관련된 러시아인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입국을 금지시켰다. 브라우더는 “러시아 정부가 겨누는 칼날은 결코 부드럽지 않다”고 썼다.

러시아 당국은 이번에 외국 기업들이 떠나는 것을 보호해줄 필요가 없다며 헐값 매각은 당연한 대가라고 얘기한다. 또 외국 기업을 싸게 샀다며 횡재라고 떠든다. 매각된 자산은 주로 크렘린과 연줄이 있거나 친푸틴 인사들에게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러시아는 이참에 자국산 브랜드를 만들게 됐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스타벅스는 유사한 명칭인 ‘스타스 커피’로, KFC는 예전 러시아 닭고기 체인명인 ‘로스틱스’로 상호를 바꿨다. 1990년 1월 모스크바에 오픈해 ‘자본주의 침투’의 상징이었던 맥도널드가 철수하자 그 자리엔 ‘브쿠스노 이 또치카’라는 새 프랜차이즈 매장이 들어섰다. 맥도널드가 나가도 아무 문제없다는 듯 자국산 햄버거 브랜드를 부리나케 론칭시켜 시민들 불만을 잠재운 것이다.

국내 러시아 전문가들이 “왜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 진출을 안하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현대차 철수 건은 그 답변이 될 수 있다. 해외 투자 시 수익과 비용, 위험 요인 등을 세밀히 따지는 기업 속성상 러시아는 아직 마음껏 진출하기 힘든 나라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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