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공연에도 ‘몰입’했던 연극… 거장 숨겨진 작품 공개에 ‘감격’
흥미로웠던 韓번역상
AI 도움받은 수상자 나와 주목
기억하고픈 부산영화제
시네마 천국 일원된듯 영화 즐겨
놀라웠던 BTS 전원 입대
막내 정국까지 군복… 외신 조명
아쉬웠던 문학상 불발
노벨상·부커상 등 韓 수상 좌절
아팠던 검정고무신
이우영 저작권 분쟁끝 세상 등져
떨림의 신춘문예
당선소식 전하며 기쁨 함께 느껴
2023년의 끝에서 문화부 기자들이 1년을 돌아보며 그 속에 박혀 있는 ‘결정적 순간’들을 찾았다. 울고 웃고 몰입해 감격했던 순간, 설레고 놀랐던 순간, 또 아쉽고 아팠던 순간들. 모두가 동의하는 ‘육각형’ 객관적 경중이 아닌 매우 사적인 감각으로 꼽은 최고의 순간들이다. 영화, 책, 공연, 미술, 종교 등 문화 현장에서 바쁘게 취재하고 기사를 쓰며 1년을 보낸 기자들이 선정한 2023 ‘최고로 ○○한’ 결정적 순간들이다.
■ 몰입한 순간
지난 8월 국립극단의 ‘이 불안한 집’은 1부 110분, 2부 95분, 3부 65분으로 인터미션까지 포함해 총 5시간에 달하는 길이를 자랑한다. 영국 작가 지니 해리스가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김정 연출이 국내에서 처음 선보였다. 2023년 가장 길었던 공연이라 지레 겁을 먹었지만 무대가 시작되자마자 작품 속으로 빠져들었다. 호흡이 짧은 콘텐츠가 범람하고 있는 시대에 반기를 드는 작품 같아 반가웠다. ‘연뮤덕’들의 공연에 대한 애정도 엿볼 수 있어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은 5시간 동안 누구도 나가지 않고 공연에 몰입했고 인터미션에 간식으로 저녁을 때우며 작품에 대해 토론하는 열정을 보였다.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아 향후 오래오래 볼 수 있는 연극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민우 기자 yoome@munhwa.com
■ 흥미로웠던 순간
챗GPT를 중심으로 AI 논의가 휘몰아친 올해 초. 40대 일본인 여성이 초급 수준의 한국어로 권위 있는 한국어 번역상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2022 한국문학번역대상’ 웹툰 부문 수상자였다. 그는 한국어가 서툴지만 AI 이미지 번역기를 활용해 인기 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를 일본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일종의 ‘초벌 번역’을 AI에 맡긴 셈이다. 만화 마니아인 그는 만화적 표현과 리듬감에 익숙했고, AI 번역본을 다시 쉽고 생생한 일본어로 바꿨다. 그리고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1등이 된 것. 이때 작품을 번역한 건 AI인가, 사람인가. 그의 수상은 온당한가. 번역의 미래는, 그리고 사람의 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들은 AI 시대 가장 첨예한 문제들과 닿아 있다. 취재 현장에서 마주한 우연이 사실은 거대한 시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는 것. 이를 체감한 순간이 가장 흥미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 감격스러웠던 순간
지난 9월에 시작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장욱진 화백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엔 연말까지도 매일 2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린다. 대부분 1955년 작 ‘가족’을 눈에 담으러 온다. 지난 1년간 숱한 미술인과의 만남 중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와의 대화가 여운이 남는다. 60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가족을 일본에서 직접 찾아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배 학예사는 일본 오사카(大阪)의 낡은 아틀리에 창고를 열어 그림을 세상에 꺼냈을 때 느꼈던 벅찬 감격을 상기된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잘 열리지도 않는 낡은 벽장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액자 하나가 깊숙이 꽂혀 있는 게 보이는데, 딱 느낌이 왔어요. ‘그림이 날 기다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배 학예사의 마음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었다. 전시를 찾은 독자들은 장욱진 그림의 또 다른 발견자가 됐을까.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 설렜던 순간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21세기 최고의 시네아스트 중 한 명이자 칸 국제영화제 단골손님. 20년 전쯤엔 이 태국 감독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지에 따라 시네필 여부를 판가름하는 믿거나 말거나 한 기준이 있었다. 지난 7∼9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아피찻퐁의 작품을 상영하고, 그가 내한한다는 소식에 설렜다. 미술관으로 초대된 이 세계적 예술가는 “모두가 창작자인 시대에 미술관과 영화관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며, 자신에게 영화란 “외부를 막아주는 방패인데, 점점 방패가 투명해지고 있다. 삶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피사체와 관객이 구별되지 않는 그의 영화처럼, 그는 영화와 하나가 되고 있는 걸까.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수줍게 사인받은 지 12년 만에 그와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 오래 기억하고픈 순간
영화를 좋아했던 대학원생에서 영화 담당 기자로 10년 만에 부산영화제를 다시 찾았다. 지난 10월 4일 개막부터 닷새간 부산에 머물며 영화를 보고, 영화인들도 만났다. 기자가 되니 프레스 배지란 걸 받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인 일반 예매에 비해 좀 더 예매하기 쉬웠다. 대체로 예매에 성공했고, 그래서 실패한 불특정 다수에게 미안했다. 하루에 3∼4편 정도 봤는데, 특히 알렉산더 페인의 ‘바튼 아카데미’를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본 경험은 기억해두고 싶다. 모두가 ‘시네마 천국’의 일원이 된 양 함께 웃고 울고 박수를 쳤다. 수많은 관객은 여전히 좋은 영화를 찾아 헤매고, 관객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그 영화는 완성된다.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 놀라웠던 순간
지난 12월 12일,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 전원이 군 복무를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진에 이어 올해 12월 지민과 정국이 동반 입대하며 모두 군복을 입었다. 맏형 진은 1992년생, 막내 정국은 1997년생이다. 정국은 2027년까지 입대를 미룰 수 있었으나 이른 군 복무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BTS의 공백기가 최소화됐다. 이는 역대 어떤 보이그룹도 일구지 못한 성과다. 통상 긴 시간에 걸쳐 각 멤버가 입대와 제대를 반복하는 동안 대중의 기억에서 잊히고, 멤버들은 나이를 먹는다. 하지만 BTS는 2025년 6월이면 ‘완전체’가 가능하다. 그들은 그 어려운 것을 해냈다. 그래서 정국의 결정이 놀라웠다. 이 소식은 주요 외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제 외국인들도 ‘신체 건강한 한국 남성은 누구나 군대에 간다’는 것을 안다. 또 한 번 놀랍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 아쉬웠던 순간
세계 3대 문학상이라 불리는 상들이 있다. 노벨문학상과 부커상, 공쿠르상. 시상식 날짜가 다가올수록 문학 담당 기자의 마음은 기대와 함께 부담감으로 차오른다. 한국 작가가 이 상을 탄다면 그야말로 ‘큰일’. 1면 기사는 물론 작가와 작품, 수상 의미에 대한 기사들을 바로 쏟아내야 한다. 이 때문에 기사를 미리 준비해 놓는다. 지난 4월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을 때도,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가 올랐을 때에도 그랬다. 10월 노벨문학상 발표를 앞두고 김혜순 시인의 수상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이 돌면서 기자들을 긴장시켰다. 결과적으로 한국 작가의 수상 소식은 없었다. “다행”이라고 실없는 농담을 했지만 아쉬운 순간이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 안타까운 순간
지난해 11월 데뷔한 걸그룹 피프티피프티가 데뷔 4개월 만에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에 입성하며 방탄소년단·블랙핑크의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웠다. 좋은 음원과 글로벌 SNS 틱톡을 활용한 마케팅이 주효한 ‘중소돌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지난 6월 피프티피프티 네 멤버는 소속사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며 파경을 맞았다. 하지만 이는 기각됐고, 소속사로 복귀한 멤버 키나를 제외한 3명은 130억 원대 민사 소송에 휩싸였다. 통상 소속사와 스타가 대립각을 세우면 대중은 스타를 지지한다. 그러나 데뷔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멤버들의 무리한 요구에 대중조차 등을 돌렸고, 가요계와 유관 단체까지 나서 멤버를 빼가는 ‘탬퍼링’ 문제를 제기했다. K-팝 역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멤버들이 스스로 복을 걷어찬 상황을 두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우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 아팠던 순간
세계가 주목하는 콘텐츠 강국의 어두운 이면이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났다. 지난봄 저작권 분쟁에 시달리던 한 창작자가 세상을 등진 것. 고인의 힘겨웠던 싸움이 ‘죽음’ 이후에야 제대로 알려졌고, 우리 모두를 아프게 했다. 1990년대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으로 잘 알려진 고 이우영 만화가 이야기다. ‘검정고무신’은 십 수년간 연재됐고 다양한 세대의 사랑을 받은 ‘국민 만화’다. 그러나 원작자인 고인은 자신이 탄생시킨 만화 속 캐릭터들을 마음껏 그리거나 가져다 쓸 수 없었다. 저작권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애썼으나 오히려 소송을 당하기까지 했다. 창작자의 순진함과 연약함이 있었고, 계약은 애초에 불리했다. 출판·만화계에 만연한 불공정 관행이 드러났고, 문화체육관광부의 표준계약서 개정과 일명 ‘검정고무신 방지법’ 등이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최근 법원이 고인 측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자 출판사 측이 불복해 항소했다. 다시 원점이다. 탁월한 창작자를 잃은 아픔이 쉬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 떨림을 함께한 순간
문학 기자에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신춘문예’라고 할 수 있다. 12월 작가 지망생들의 작품을 받고 새해 첫날 당선작을 선보이는 일. 202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응모된 작품은 총 3890편.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서류봉투를 일일이 뜯어 정리했다. 서류봉투 안에 든 것은 단순히 종이 몇 장이 아닌, 작가를 꿈꾸는 이들의 일생의 ‘꿈’이자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하나하나 조심스레 다룰 수밖에 없었다. 혹시 실수로 원고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연락처를 못 찾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이어졌다. 초긴장해 공모작을 분야별로 정리하고 심사위원들을 모셔 심사를 했다. 이때까지의 과정이 고생이라면 당선 사실을 전하는 일은 담당 기자의 너무 큰 기쁨. 당선 소식에 누군가는 “정말요?”를 반복했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든 채 한참을 울었다. 새로운 작가의 떨리는 탄생을 함께한,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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