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사건이 ‘군사반란’인 이유 [박찬승 칼럼]

한겨레 2023. 12. 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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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칼럼]군형법상 반란죄는 다수의 군인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국권에 반항함으로써 성립되는 범죄이고, 국권에는 군의 통수권 및 지휘권도 포함된다. 그런데 전두환 등 신군부는 대통령 재가 없이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참모총장을 체포하였으므로, 불법 체포 행위를 넘어 대통령의 군 통수권 및 육군참모총장의 군 지휘권에 반항한 행위로서, 이는 ‘반란’에 해당한다고 법원은 판시했다.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12·12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모을 정도로 인기가 뜨겁다. 1979년으로부터 44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왜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까. 물론 선악의 뚜렷한 구별, 계속되는 긴박한 상황, 영웅적 서사와 같은 영화적 재미가 큰 구실을 했겠지만, 이 사건의 구체적 진행 상황을 처음 알려주는 영화라는 점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12·12 사건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1980~90년대에 여러 주장이 있었다. 이 사건을 주도한 전두환 등 이른바 신군부 쪽에서는 이 사건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우발적 충돌’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장태완 등 반대 쪽에 섰던 이들은 이 사건이 하나회 쪽 군인들이 군권을 찬탈하기 위해 저지른 ‘군사반란’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1996년 검찰 일각에서는 12·12 사건부터 5·18에 이르는 전 과정을 ‘내란’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97년에 대법원은 ‘광주민주화운동과 내란음모사건’(12·12 사건과 5·18 사건)의 재판에서 1979년 12·12 사건을 ‘군사반란’이라고 규정하였고,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부터 이듬해 1월24일 비상계엄 해제까지 신군부의 행위를 ‘내란’으로 규정하였다. 이후 이러한 규정은 우리 사회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법원은 왜 12·12 사건을 ‘군사반란’이라고 규정했을까. 판결문을 통해 이를 살펴보자. 판결문에서는 먼저 정승화 참모총장 강제 연행의 위법성을 지적하고 있다. 즉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당시 그에 대한 강제 수사가 필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체포 목적이 그의 범죄 혐의 수사가 아닌 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반대 세력을 약화·동요시키기 위한 데에 있었다고 보고, 따라서 이는 위법한 체포 행위라고 법원은 판단했다.

더욱이 군법회의법에 의하면 군인인 피의자를 구속할 경우에는 검찰관이 사전에 관할관의 구속영장을 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범죄 수사를 목적으로 참모총장을 체포할 경우에는 사전에 검찰관이 관할관(국방부 장관)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아야 했지만, 전두환 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판결문은 지적했다.

또 12일 저녁 전두환이 국무총리 공관에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참모총장 체포 재가를 요청했을 때 최 대통령은 이를 거절하였고, 다음날인 13일 새벽 5시10분에야 대통령은 이를 재가하였다. 하지만 이는 전두환 세력이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본부와 국방부 등을 점령하고, 육군의 정식 지휘계통인 참모차장, 수도경비사령관 등을 제압한 뒤에 받아낸 사후 승낙에 불과한 것이므로 참모총장 체포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1996년 8월26일 수의를 입고 선고 공판을 기다리는 두 전직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 전씨는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혐의로 구속됐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반란죄와 내란죄가 확정되어 무기징역형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사면됐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다. 사진공동취재단

군형법상 반란죄는 다수의 군인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국권에 반항함으로써 성립되는 범죄이고, 국권에는 군의 통수권 및 지휘권도 포함된다. 그런데 전두환 등 신군부는 대통령 재가 없이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참모총장을 체포하였으므로, 불법 체포 행위를 넘어 대통령의 군 통수권 및 육군참모총장의 군 지휘권에 반항한 행위로서, 이는 ‘반란’에 해당한다고 법원은 판시했다.

또 전두환 쪽의 대통령 경호실 병력이 국무총리 공관으로 출동하여 공관 경비 병력을 무장해제시키고 공관을 점거·포위한 일이나, 전두환·유학성 등 장성 여럿이 12일 밤 9시 반에 국무총리 공관으로 가서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 총장 연행 재가를 재차 요구하면서 대통령을 강압한 사실도 대통령의 군 통수권에 반항한 행위로서 ‘반란’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다.

또한 전두환 등은 12일 밤 육군 정식 지휘계통에 대한 선제공격을 결의하고, 제1공수·제3공수부대원들을 동원하여 자정께부터 이튿날 아침 6시께까지 육군본부, 국방부 청사, 중앙청 등을 점령하는 한편, 특전사령관과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 있던 육군참모차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 육군본부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했다. 이는 계엄 지역에서 육군 정식 지휘계통의 사전 승인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시적인 병력 출동 금지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지휘권 아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 지휘계통을 공격한 것으로,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군의 지휘권에 반항한 행위여서 ‘반란’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다.

이상의 여러 이유를 들어 법원은 “12·12 사건은 군사반란”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군형법의 반란수괴, 반란모의 참여, 반란중요임무 종사, 불법 진퇴, 지휘관 계엄지역 수소 이탈, 상관 살해, 상관 살해 미수, 초병 살해 등 죄목을 적용하였다.

한편 이 재판에 앞서 1979년 12·12 반란 행위로부터 15년이 지나 공소시효가 이미 만료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1995년 12월21일 5·18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12·12 사건 및 5·18 광주항쟁 강제진압 관련자들의 공소시효가 노태우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1993년 2월24일까지 정지된다고 명시하였고, 헌법재판소도 이를 인정하였다. 이로써 공소시효 문제는 말끔히 해결되었다. 국회는 동시에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하여, 내란과 군사반란 등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했다. 이로써 향후 군사반란이나 내란을 꿈꾸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12·12 군사반란은 1960~70년대 군부집권 시대를 12년여 더 연장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군사반란 주범과 공범들은 문민정부가 시작된 김영삼 정권기인 1996년 모두 체포되어 사법적 단죄를 받았다. 1979년에는 그들이 현실의 승리자였던 것처럼 보였지만, 17년이 지난 뒤 그들은 역사의 패배자요, 법정의 죄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대반전은 대한민국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망으로 비로소 가능했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 우리는 12·12 그날의 실패에 분노와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역사의 반전을 이루어낸 한국 민주주의의 힘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를 계승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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