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옛것이 지금도 남아있으면 일어나는 일들
●카페가 된 87년 건물
크리스마스트리와 눈사람 조형물이 무대와 스크린이 있는 한쪽 벽 앞에 놓였다.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에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귀에 익숙한 음악이 잔잔하게 퍼지진다. 오늘은 커피 대신 청으로 만든 따듯한 흑당생강차를 마신다. 대추롤케이크와 대추마들렌은 충북 보은군 특산품인 '보은대추'를 넣어 만든 것이다.
너른 공간에 테이블 사이 거리도 넉넉해서 마음도 여유롭다. 주문하는 곳 앞 넓은 테이블 위에 빨간 꽃이 핀 작은 화분 하나 놓였다. 시클라멘속이라고 꽃 이름을 알려준 건 카페 주인이었다. 여러 꽃을 키워봤는데, 이 꽃이 가장 생생하게 잘 살았다며 밝게 웃는다. 밝은 햇빛이 창으로 든다.
생강 향 은은한 차 한 모금 마신다. 생각해보니 창문이 어색하다. 옛날 사무실 창문 같다. 카페가 1936년에 건립되어 충북산업장려관으로 쓰던 건물에 들어선 것이다. 건물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카페 이름은 꿈드래 카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관록이 풍긴다. 2층으로 올라가며 벽과 벽에 난 창,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본다. 한 예술가가 시간을 상징하는 소재들, 이를테면 (시간을 묻는)시계, 물결, (시간을 낚는) 낚싯줄 등속의 것들을 창문과 계단의 특성을 고려해 그려 넣었다. 물결을 그려 넣은 2층 둥근 창으로 햇볕이 드니, 그 햇볕 또한 시간을 상징하는 소재라고 할 수 있겠다. 햇볕 드는 오래된 2층 둥근 창에 흐르는 물결을 그리고 그곳에서 던진 낚싯줄 끝에는 흐르는 시간을 상징하는 둥근 시계 모양의 설치물이 걸려있다. 시계 모양의 설치물에는 '지금 몇 시 인가요?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햇볕, 물결, 시간, 모든 것은 흐른다. 예술가는 오래된 건물 죽은 벽에 그림으로 새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었다.
●추억에 예술까지, 대성로 122번 길
카페에서 나와 대성로 122번 길 초입에 섰다. 지금 한창 공사중인 그곳에 예전에 중앙초등학교가 있었다. 400m 정도 뻗은 길 끝은 청주향교다. 줄기 굵은 플라타너스 나무가 가로수다. 가로수 가지가 싹둑 잘렸다. 예전에는 높고 넓게 퍼져 자란 플라타너스 가지가 플라타너스 터널을 만들었었다. 가랑비 정도는 거뜬히 막아주는 플라타너스 터널은 동화에 나오는 푸른 길 같았다.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 떨어진 나뭇잎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그 길을 걸으면 400m 길은 금세 끝났다.
그 길에서 처음 만난 오래된 것은 우리 예능원 건물이다. 국가등록문화재인 그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충북 지부장의 사택으로 지어진 것이다. 1955년에 정원을 없애고 강당을 지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마림바(실로폰의 일종으로 음판 밑에 공명관을 장치한 악기) 연주를 가르치는 곳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지금 봐도 이국적인 건물인데, 1924년에 건물이 지어졌을 때는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벽화를 따라 걷다가 만난 건 '당산 생각의 벙커'였다. 방공호였는데 최근에 시민들에게 개방 했다. 아직 쓰임새가 정해지지 않아 빈 공간인 채로 사람들이 둘러볼 수 있게 했는데, 벌써부터 그곳을 찾는 사람들 발길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빛을 이용한 예술, 영상예술을 선보이는 장소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당산 생각의 벙커
이용시간 : 오전 10시~오후 5시
2023년 12월까지 개방. 새 단장을 하고 2024년 5월부터 다시 개방할 계획.
●문학과 예술의 공간 그리고 쉼터
충북문화관
카페가 몇 개 보이는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충북문화관이었다. 충북도지사 관사로 쓰던 곳인데 지금은 문학과 예술의 공간이자 고즈넉한 쉼터로 자리 잡았다.
크고 작은 나무가 이룬 작은 숲이 정원이다. 그 숲에 자리 잡은 둥지 같은 건물은 문화의 집으로 쓰인다. 충북의 11개 시•군을 대표하는 12인의 문인들 이야기가 전시 됐다. 청주의 신채호, 신동문. 보은의 오장환. 옥천의 정지용. 영동의 권구현. 괴산의 홍명희. 증평의 김득신. 진천의 조명희. 음성의 염재만. 충주의 권태응. 제천의 권섭. 단양의 우탁 등이 그들이다.
문인들의 이야기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건물의 건축양식을 소개하는 전시물이 있는 복도를 지나 일본식 건물이 나온다. 다다미가 깔린 방에는 책상과 의자, 책이 있다.
문화의 집을 둘러싼 작은 숲에 의자와 테이블을 놓아 쉬게 했다. 숲에 설치된 조형물에 눈길이 머문다. 버섯 모양의 커다란 조형물은 어떻게 보면 땅속으로 몸을 숨긴 고래의 꼬리 같기도 하다. 산기슭에 놓인 노란색 둥근 조형물은 달을 표현한 것 같다. 동산에 뜬 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숲 한쪽에 숲속갤러리가 있어 자연과 함께 예술의 향기를 느껴본다.
●청주의 달동네
대성동 골목길
충북문화관을 나와 청주 향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청주 향교를 둘러싼 마을은 예전부터 청주의 달동네, 대성동이다.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사라진 이유가 소음 규제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어릴 때는 해마다 12월이면 거리 마다 울려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70년대에는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은총이 내려 나라 전체가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았는데... 살만해진 요즘 세상 참 각박해졌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소음이라니...
12월 어느 날, 향교 주변 대성동 뒷골목을 걸었다. 어른 둘이 걸으면 꽉 차는 골목 어느 집 담벼락은 시멘트를 뿌려서 마감한 70년대식이다. 페인트칠 색 바랜 담벼락 갈라진 실금 같은 골목길을 걸어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골목길 높이에 아랫집 지붕이 걸쳤다. 기와와 슬레이트로 조합한 지붕이다. 턱 높은 시멘트 계단을 스무 개 남짓 올라서야 대문이 나오는 집 앞을 지나 벽이 담인 낡은 골목으로 접어들자 마당을 지키는 개들이 컹컹 짖어댄다. 전봇대에서 시작된 가는 전깃줄들이 골목 위 하늘에 거미줄처럼 얽혔다.
막다른 골목에서 돌아 나와 또 다른 골목으로 가는 길에 우물을 보았다. 마을 공동우물이었다. 지방 중소도시에도 마을의 공동우물이 있었던 70년대였다. 동네 아줌마들이 나물 씻고, 빨래하던 곳이었다. 우물물은 겨울에도 얼지 않았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얼음장 같은 물로 빨래하던 어머니의 벌개진 손등이 기억났다. 우물 위 달동네 골목길에서 보이는 저 아래 시내에서는 그날도 성탄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축제처럼 울려퍼졌을 것이다.
달동네 골목길에서 70년대식으로 걸어 나왔다. 달동네 작은 카페 <이상>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찻잔에 담긴 따듯한 차의 온기를 어루만지며 창밖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크리스마스 캐럴을 흥얼거렸다.
글·사진 장태동 트래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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