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을 쓰고픈 노시환의 ‘첫 페이지’…숱한 실패와 좌절이 만든 ‘홈런왕’[송년기획]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이룬 첫해 ‘신인’ 노시환은 “야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남고를 졸업한 그는 2019 KBO 신인드래프트에서 ‘야수 최대어’로 꼽히며 2차 1라운드 3순위로 한화의 지명을 받았다. 프로 입성을 앞둔 노시환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당시 그는 이정후(2017년)와 강백호(2018년)가 일으킨 ‘신인 돌풍’을 2019년 자신이 이어가는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하지만, 프로 무대는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루키 노시환의 2019시즌 최종 성적은 91경기 타율 0.186, 1홈런, 13타점, OPS(출루율+장타율) 0.501. 지난 21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기자와 만난 노시환은 “야구를 너무 못했다. 내게 재능이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었다”며 “욕도 많이 먹어서 진짜 야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프로에서 경험한 첫 번째 실패였다.
■숱한 실패와 좌절이 만든 홈런왕
“‘이정후, 강백호, 노시환’이라는 마음으로 시즌을 치렀는데, 1할8푼을 쳤어요.” 노시환은 지금 돌이켜봐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프로의 쓴맛을 일찍 본 경험은 이후 그가 성장하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 노시환은 “당시 한용덕 감독님께서 저를 끝까지 1군에 데리고 다니면서 출전 기회를 주셨다”며 “만약 그때 시련과 프로의 벽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좋은 성적을 내기까지 시간이 더 길어졌을 것”이라고 의미를 찾았다.
‘신인’ 딱지를 떼고 맞은 2020시즌 홈런 12개를 터트리며 ‘거포’로서 자질을 드러낸 그는 2021시즌 홈런 18개를 날리며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노시환은 프로 4년 차 두 번째 실패를 겪는다. 2022시즌 그는 데뷔 이후 가장 높은 타율(0.281)을 기록했으나, 홈런이 6개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노시환은 “홈런 개수가 계속 올라야 하는데, 작년에 6개를 치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타율 등 나아진 타격 지표도 있었지만, ‘홈런타자’가 되길 바라는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발전이 없겠다’고 생각한 시점이라고 한다. 노시환은 2022시즌 종료 뒤 진행된 마무리캠프에서 김남형 타격코치와 ‘장타’에 초점을 맞춰 타격 자세를 수정하며 비장한 각오로 2023시즌을 준비했다. 그러나 변화의 성과가 조금이라도 나타나야 할 스프링캠프에서 줄곧 타격감이 좋지 않았다.
그는 “마무리캠프와 비시즌에 준비했던 게 스프링캠프에서 전혀 안 돼 좌절감을 느꼈다”며 “‘중간에 바꾸면 자기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코치님 조언에 따라 끝까지 밀고 나갔다”고 설명했다. 개막 전 시범경기에서 비로소 원하던 결과가 나왔다. 노시환은 시범 12경기에서 홈런 5개를 날리며 장타율 0.971을 기록했다. 그는 “저는 원래 밀어친 홈런이 많았다. ‘히팅 포인트’가 늦다는 뜻이었다”며 “그동안 야구를 하면서 당겨친 홈런이 많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대부분 당겨친 홈런이 나왔다.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규시즌은 또 달랐다. 4월 한 달 노시환의 홈런 개수는 2개에 그쳤다. ‘스윙을 더 크게 해야 하나’라는 잡념이 들며 자칫 흔들릴 뻔했다. 뚝심 있게 자신의 스윙을 지킨 노시환은 5월부터 본격적으로 ‘홈런 공장’을 가동하며 빠르게 홈런 개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5월 한때 43타석 연속 무안타 부진에 빠졌을 때도 타격폼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44타석 만에 다시 안타를 생산했는데, 이때 나온 안타가 홈런이었다. 이번 시즌 그가 설정해둔 ‘방향성’을 확실히 보여준 장면이다.
2023시즌 노시환의 최종 성적은 타율 0.298, 31홈런, 101타점, OPS 0.929. KBO 홈런왕과 타점왕에 등극한 그는 3루수 골든글러브까지 품에 안으며 올해 KBO 최고의 타자로 인정받았다. 노시환은 “큰 변화에 도전한 첫해에 홈런왕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 올해 가장 큰 수확이었다”고 했다.
■한화, 이정후, 오타니…전설을 향한 다음 키워드
노시환은 KBO리그에서뿐 아니라 여러 국제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대표팀 4번 타자로 활약하며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2023에서도 ‘국제용 타자’로서 면모를 보여줬다. 국내외를 오가며 숨 가쁜 한 해를 보낸 노시환은 ‘꾸준함’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1년 반짝한 선수는 많이 있다. 정말 대단한 건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시환은 최근 미국프로야구(MLB) 샌프란시스코와 6년 1억1300만달러에 계약한 이정후를 떠올렸다. 그는 “부상도 거의 없이 매년 꾸준한 성적을 낸 점이 정말 멋있는 것 같다”고 했다. 노시환도 마음 한편에 빅리그 진출의 꿈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조건이 있다. KBO리그에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선수가 되는 것이 먼저다. 노시환은 “어릴 때부터 MLB에서 뛰는 걸 꿈꿔왔다. (이)정후 형처럼 모두가 박수를 보내며 인정할 때 도전하고 싶다”며 “저는 아직 보여줘야 할 게 많이 남았다. 한국에서 커리어를 더 쌓고, 꿈을 위해 도전하는 모습에 박수를 얻으며 미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전했다.
그는 2024시즌 한화와 더 높은 비상을 꿈꾼다. 다음 시즌 홈런왕 등의 개인적 목표는 없다. 다만, ‘가을야구’라는 팀적인 목표는 확고하다. 한화는 노시환 입단 1년 전인 2018년에 마지막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다시 말해 그는 아직 가을야구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노시환은 “(정)은원 형에게 가을야구는 어떠냐고 맨날 물어본다. 야구만 잘하면 ‘대전 구장이 더 뜨겁게 끓어오를 텐데’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며 “내년에는 가을야구에 꼭 가야겠다는 ‘열망감’이 있다. 이젠 팬분들께도 보답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고 다짐했다.
프로 데뷔 이후 최고의 시즌을 보낸 노시환에게 야구 선수로서 궁극적인 목표를 물었다.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처럼 국적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전설적인 선수”라는 당찬 답변이 돌아왔다. 어쩌면 전설의 시작이었을지 모르는 노시환의 한 해가 더 큰 꿈과 함께 지나가고 있다.
배재흥 기자 he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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