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던 얼굴을 빤히…나를 빛내는 ‘영혼의 색’ 찾기 [ESC]
피부·모발·눈동자 등 나만의 색깔 찾아내 ‘웜톤·쿨톤’ 조화 따져
진단 과정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어울리는 옷 사고 갑옷 얻은 듯”
“내게 어울리는 색상·명도·채도 알면 돼”…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인기
“빨간 망토 차차는 장난꾸러기 같지만, 붉은 망토 차차는 혁명을 일으킬 것 같음.”
익명의 사용자가 온라인에 올린 이 짧은 문구는 한때 여러 번외편까지 만들며 큰 인기를 끌었다. 빨간 머리 앤이라면 “넌 영원한 내 친구야, 다이애나”라고 하겠지만, 붉은 머리 앤이라면 “넌 영원한 내 동무야”라고 할 것 같다는 식이다. 유머라지만, 따지고 보면 꽤 예리한 지적이다.
빨간색이라고 했을 때 머릿속엔 밝은 톤의 레드가 떠오르지만, 붉은색이라고 했을 때는 다소 어두워진 진한 레드가 생각난다. 색깔은 이처럼 미묘하다. 한끗 차이가 만드는 간극이 크다. 퍼스널컬러(personal color)는 바로 이 색깔의 미묘한 차이에 집중한다. 퍼스널컬러란 각자가 타고난 신체의 고유색을 말한다. 피부·모발·눈동자 색 등을 포함한다. 더불어 그 사람과 조화를 이뤄 ‘개성’을 빛나게 하고,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개개인의 컬러를 말한다. 같은 빨간 망토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겐 깜찍하고 발랄한 패션 아이템이 될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붉은 혁명의 깃발을 둘러놓은 듯하게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퍼스널컬러는 최근 2~3년간 한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올해 6월 기준으로 틱톡의 퍼스널컬러 진단 필터를 의미하는 ‘컬러애널리틱’(ColorAnalytic)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 조회수가 9억700만회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퍼스널컬러의 어떤 매력에 사람들은 이처럼 열광하는 것일까?
‘내 색깔’ 찾는 중·장년 엄마들
퍼스널컬러의 기본이 되는 것은 각각 따뜻함과 차가움을 뜻하는 ‘웜’과 ‘쿨’이다. 웜톤은 노랑, 쿨톤은 파랑 베이스가 기본이 된다. 초록색의 경우 노란색이 섞인 연두는 웜톤, 파란색이 섞인 청록은 쿨톤이 된다. 퍼스널컬러가 웜톤일 경우 노란색 계열이 섞인 진단천을 댔을 때 얼굴이 건강하고 생기 있어 보이지만, 쿨톤 천을 대면 창백하고 얼굴과 분리돼 보인다. 쿨톤의 경우에는 파란 계열이 섞인 진단천을 댔을 때 피부가 깨끗한 느낌이 들지만, 웜톤 색을 댔을 땐 칙칙하고 누렇게 떠 보이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명도와 채도에 따라 다시 봄·가을(이상 웜톤)과 여름·겨울(이상 쿨톤)로 갈린다. 기본적인 분석 뒤에 다시 수많은 색깔천을 얼굴 밑에 대보면서 컨설턴트와 함께 나를 가장 빛나게 만들어주는 컬러들을 뽑아낸다. 채도와 명도에 따라 비비드, 라이트, 뮤트, 딥 등 여러 가지 세부 분석들로 나뉘지만 여기에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길을 잃기 쉽다.
퍼스널컬러 상담 업체인 마이컬러랩을 운영하고 있는 한지운 대표(디자인학 박사)는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고객들이 복잡한 용어의 늪에서 헤매는 경우다. 용어에 집착하지 말고, 컬러 카드 등을 들고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색상·명도·채도의 범위를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조언한다.
퍼스널컬러 상담을 받았던 이들은 ‘나의 색’을 찾고 나서 겪은 가장 큰 변화로 자신감을 꼽는다. 나와 조화를 이루는 색으로 장착하고 마주한 세상의 공기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이다. 프랑스인 제시카 자우이도 한국에서 퍼스널컬러를 찾은 뒤 삶의 많은 부분이 변했다. 언제나 무채색의 옷을 입던 그가 찾아낸 퍼스널 컬러는 ‘봄 웜’이다. 따뜻하고 밝은 색들은 이제 자우이의 옷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이가 넷인 자우이에게는 밝은색 옷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을 키워내면서 자신의 외모를 찬찬히 둘러볼 시간은 많지 않았던 탓이다. 그랬던 그에게 친구와 가족들은 40살 생일 기념으로 뜻깊은 선물을 줬다. 한국 방문이 꿈이었던 그를 위해 서울행 비행기 티켓과 호텔 숙박권을 마련한 것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이 퍼스널컬러 상담소였다.
자우이는 “상담을 통해 내가 스스로 나의 색이나 외모를 가꾸고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나서는 기분이 정말 좋아졌다. 어울리는 옷을 입고 어울리는 메이크업을 하면 힘이 솟는 것 같다”고 말했다. 퍼스널컬러를 찾은 뒤 이어진 한국 여행은 더욱 특별하고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한복 대여소에서도 ‘봄 웜’ 계열의 한복을 골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예전엔 광대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 같아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밝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것도 큰 변화였다. 립스틱 색을 바꾸고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는 그는 이제 화장이나 장신구도 어울리는 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나를 스스로 돌볼 때 남들 앞에서도 당당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대표는 “퍼스널컬러와 관련된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나에 대한 ‘돌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객 중에서 특히 프랑스에서 온 자우이처럼 40~50대로 접어든 중·장년층, 특히 자녀를 가진 ‘엄마’ 고객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오랜 시간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시시각각 바뀌는 그들의 눈빛 속에는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퍼스널컬러를 진단할 때는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수십분 동안 거울 속 자신의 얼굴만 들여다보는 것은 보통 사람에겐 흔치 않은 경험이다. 게다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내 얼굴’은 수십개의 색깔과 만나면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순간들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옷장에 한번도 들인 적이 없었던 노란색이 갑자기 내 얼굴을 환하게 비추면서 거리를 확 좁혀오는 것 같은 경험 말이다.
‘이런 색이 나한테 이렇게 어울렸었나?’ ‘나한테도 이런 분위기가 있었나?’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제대로 돌아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이지?’ 1974년생인 김선아(가명)씨는 50살이 되기 전 연말에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퍼스널컬러 상담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내 선택으로 비혼을 택하기는 했지만, 나도 모르게 어딜 가든 위축되는 마음이 요즘은 가끔 들었어요. 주로 입는 옷들이 검은색인데, 뭔가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김씨는 ‘여름 쿨톤’ 진단을 받았다. 상담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밝은 하늘색 코트를 샀다. “이런 비유를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뭔가 갑옷을 하나 얻은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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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미적 감각 믿어요”
최근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퍼스널컬러 상담은 한국 여행 중에 체험해야 할 코스로 꼽힌다. 서울 중구에서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는 한지운 대표는 “명동에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인지는 몰라도 외국인 관광객들의 상담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며 “케이(K)컬처 바람과 함께 한국 사람들의 미적 감각은 믿을 만하다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유학 경험이 있는 프랑스의 20대 여성 가브리엘 셰티는 한국의 앞선 패션 감각을 익히 알고 있다. 지금은 파리에 살고 있는 셰티는 “인터넷에서 한국 관광 체크리스트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퍼스널컬러 상담”이라며 “한국에서는 거리에만 나가도 사람들이 옷을 잘 차려입는다. (이런 나라라면) 어떤 옷을 입어야 가장 잘 어울리는지 잘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0대 때 소심한 성격 탓에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검은색 뒤에 숨었었지만, 이제 겨울 쿨톤이라는 자신의 색을 찾았다. 올겨울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파리로 돌아가기 전 겨울 쿨 계열의 옷들로 여행가방의 빈자리를 채울 생각이라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국 출신 마케터인 헤더 호너는 한국·일본·베트남 등 6주간의 아시아 여행길에 퍼스널컬러 컨설팅을 받고 ‘가을 뮤트’ 진단을 받았다. 미국에 살 때도 브라질 출신 상담사에게 상담을 받은 적이 있지만, 자신에게 맞는 색을 찾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해 아시아 여행길에 퍼스널컬러로 유명한 한국을 찾아 다시 상담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호너는 “색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물론 액세서리, 메이크업까지 아우르는 종합적인 상담이 만족스러웠다”며 “다른 친구들에게도 한국에서의 퍼스널컬러 상담을 추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시아이(CCI)색채연구소의 신향선 박사는 “예전엔 우리가 외국에 가서 컬러 체계를 배우고 공부했지만 201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케이(K)뷰티 바람으로 한국 화장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기업들도 색조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해 이제는 컬러 체계 등 여러가지가 역수출되는 상황”이라며 “한국 퍼스널컬러 열풍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만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한국색채산업전문가협회 집계를 보면, 2023년 5월 기준 한국에 등록된 퍼스널컬러 진단 업체는 모두 668개에 이른다. 협회는 미등록 업체나 학원까지 포함하면 1000개는 넘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2019년 170개에 비하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증가다.
사람들은 엠비티아이(MBTI) 유형을 통해 자신의 성격을 찾아 나서듯 수많은 진단천을 들이대며 자신의 톤과 색을 찾는다.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수많은 퍼스널 상담 업체를 고를 수 있다. 가격은 컨설턴트의 경력이나 갖추고 있는 진단천의 종류, 서비스 내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경력과 전문성을 갖춘 컨설턴트에게 일대일로 진단받는 비용은 10만원 안팎이다.
한국색채산업전문가협회 이사장과 한국색채학회 이사로도 활동 중인 신향선 박사는 “코로나19 확산기에 집단이 아닌 ‘나’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퍼스널컬러 분야가 급성장했고 유튜브 등에서 인플루언서까지 가세하면서 더 널리 퍼지게 됐다”고 말했다. 퍼스널컬러 도입 초기인 2000년대 초반에는 정치인·연예인처럼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한 일부 직역에 한정된 컨설팅이었지만, 이제 저변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실제 기업·학교·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진행하는 관련 강좌도 인기를 끌고 있다.
신 박사는 “내 피부, 머리카락, 눈동자 등 타고난 색에 집중하면서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여정 속에서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고 행복해하는 것을 본다”며 “사회적으로 정한 기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게 해주는 게 퍼스널컬러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윤은숙 라이프콘텐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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