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설] ‘WNBA 슈퍼스타’ 마야 무어, ‘50년 장기수’를 사랑한 이유
‘50년 징역수’를 위해 세계 최고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마야 무어는 미국 대학 4년과 프로여자농구 8년 동안 전 세계에서 100여 개의 상과 명예를 얻은 최고의 선수. 그러나 그녀는 강도죄 등으로 50년 형을 선고받아 22년 째 복역 중이던 연인을 구하기 위해 농구를 떠났다.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2019년에는 경기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농구 대신 사랑하는 사람의 석방을 위해 모든 힘을 쏟기로 한 것. 잠시 떠나기로 했던 그 결정으로 ‘농구선수 마야 무어’의 삶은 막을 내렸다.
마침내 연인이 무죄로 풀려났다. 그와 결혼했다. 아이를 낳았다. 올해 1월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성공을 측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꼭 농구만이 인생 성공의 전부가 아니다. 새로 생긴 가족, 새로운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농구로 얻은 모든 영광과 명예를 영원히 내려놓기로 했다. 농구 인생은 마감하지만 이제 미국의 형사법 제도 개혁과 총기 폭력 등의 사회 문제에 헌신하는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열기로 했다.”
■모든 것을 두루 갖춘 농구선수
마야는 2020년 미국의 ‘타임’ 지가 선정한 ‘100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뽑혔다. 올해 12월1일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선정되었다. 겨우 8년 프로선수 경력을 가진 33세 젊은이에게 그런 영예들이 주어진 것은 유례없는 일. 미국 사회에 끼친 크고도 깊은 착한 영향력이 높이 평가됐기 때문일 것이다.
코네티컷 대 은사인 지노 오리엠마 감독은 은퇴 결정을 보면서 “마야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더 큰 일과 더 나은 일로 나아가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대학스포츠위원회(NCAA) 선수권대회를 11차례 우승한 오리엠마는 충원 과정에서 선수의 품성을 가장 중요시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교 순위 1위에 청소년 국가대표였던 제자의 농구 실력에만 끌리지 않았다. 마야가 가진 인간의 깊이와 잠재성을 일찍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야는 농구도 잘했지만 공부도 잘했다. 인성이 남달랐다. 농구장 안팎에서 언제나 침착하며 겸손했다. 말솜씨도 뛰어났다. 사람들은 “농구를 떠나서도 큰 인물이 되겠다”고 입을 모았다. 심지어 “대통령 감”이란 얘기도 했다.
마야는 NCAA 선수권대회를 두 번 우승했다. 대학 4년 연속 ‘올 아메리칸.’ 두 번의 AP통신 ‘올해 최우수 선수.’ ‘웨이드 트로피’ ‘네이스미스 최우수 선수’ ‘우든 상’ 등 50여 개의 상과 영예를 얻었다.
경기 흐름을 읽고 장악하거나 동료 선수들을 이끄는 능력은 경기장 안의 지도자였다. 그만큼 농구 지능지수가 높은 선수. 2011년 3월, 코네티컷은 듀크 대와의 경기에서 75-40으로 크게 이기며 NCAA 선수권 4강전에 나갔다. 183cm의 마야는 28점에 리바운드 10개를 기록했다.
미국 농구 역사에 숱한 기록을 남긴 오리엠마 감독은 "99% 마야가 이끌어 간 경기다. 1%만이 감독의 몫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감독이 이보다 더 높이 선수를 평가할 수 있을까? 어떤 표현이 더 필요할까?
듀크의 감독조차 겨우 대학생인 마야를 두고 “살아있는 최고의 여자 농구선수”라고 극찬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선수가 될 수 없는 미국에서 마야는 4년 평균 3.7(4.0 만점)의 평점을 받았다. 2011년 AP의 ‘모든 대학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공부를 잘한 선수’ 선정. 해마다 빼놓지 않고 받은 학업 우수상과 영예는 20여 개에 이른다.
마야는 2011년 WNBA 신인 선발에서 미네소타 링크스의 1순위로 뽑혔다. 8년밖에 뛰지 않았으나 세 번 우승. 2014년 최우수선수를 포함해 여섯 차례 WNBA 올스타. 2012년, 16년 올림픽 금메달. 세계선수권대회 두 번 우승. 스페인 리그 우승. 유로리그 두 번 우승. 중국 리그 3년 연속 우승.
중국에서 3년 평균 35점 이상을 기록해 마야는 "불패(不敗) 여왕"이라 불렸다. 겸손함과 관중들에 대한 친근함으로도 큰 사랑과 찬사를 받았다. 샨시성 타이위엔 시 정부가 명예 시민증을 줄 정도였다.
마야는 나이키의 ‘조던 브랜드’와 계약한 최초의 여자 농구선수였다.
농구선수 마야는 완벽에 가까웠다. 10년 이상 더 뛸 수 있었다. 지도자로도 농구 미래는 활짝 열려있었다. 그런 농구마저 그만두면서 어떻게 ‘50년 징역수’를 다함없이 사랑하게 됐을까?
■18세 고교생과 50년 장기수의 만남
2020년 3월 조나단 아이언스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4개월 뒤 석방되었다. 23년 만에 조나단이 교도소 문을 나서는 순간 마야는 그대로 땅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다. 한참을 울었다. 그리곤 가족들과 얼싸안는 그의 옆을 돌며 펄쩍펄쩍 뛰었다.
18세 고교생 마야가 2007년 교도소 교회성가대에서 노래하던 조나단을 만난 지 13년. 두 사람은 밝은 햇빛 아래서 처음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교도소의 첫 만남에서 조나단은 마야에게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마야는 아홉 살이나 많은 그를 친구 삼기로 했다. 홀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뒤 편지로 전화로 우정을 이어갔다. 조나단이 증거도 없이 중범죄인이 된 것을 확신하면서 마야의 동정심은 정의감으로 변했다. 가끔 면회 때도 단 2초 동안만 포옹할 수 있었을 뿐. 그러나 9년 동안 우정은 사랑으로 굳어졌다.
그 세월, 마야는 누구도 뛰어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농구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를 만나기 전까지 검사들에 대해 전혀 몰랐다. 금메달을 따면서도 우물 안 개구리였다. ‘시민’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어두운 현실은 엉터리로 수감된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 목소리와 가진 자원을 사용하여 조나단의 사건을 세상에 알려 도와주고 형법 개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로 결정했다.“
조나단은 16세에 구속됐다. 거의 이십 년 동안 육체와 정신에 대한 갖은 공격과 싸워야 했다. “다른 죄수들이 구덩이에 나를 묻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이불의 실오라기로 만든 매듭으로 극단의 선택을 하려했다. ‘구덩이’에 묻히기 전 그를 건져낸 것은 ”WNBA 슈퍼스타 마야 무어의 사랑“이었다. 조나단은 “마야가 나의 목숨을 구했다”고 말한다.
2016년부터 마야는 석방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변호사들을 후원했다. 19년부터는 아예 농구를 접고 전국을 돌며 여론을 이끌었다. "나는 몇 년 동안에 사건의 진실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농구를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그 사건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미국 언론은 “만약 무어가 WNBA를 떠나 사건에 개입하여 미국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면 아이언스의 형량이 뒤집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적었다.
마야는 “‘스포츠에 전념하라.’ 스포츠가 어려운 사회 문제에 얽혀 복잡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관중들의 바램이다. 그러나 스포츠에 전념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조나단과 같은 인생을 구원하기도 한다. 우리는 각자 우리 앞에 있는 선택지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는 남이 따를 모범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에게 가장 알맞은 결정을 내린 것뿐”이라고 말했다. 농구보다 사랑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답변이었다. 담백하기 그지없다.
조나단은 “나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교도소에 있는 남자와 사귀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고 옛날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석방 7일 뒤 결혼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뒤 우리는 친구들과 호텔 방에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둘 만이 남았다…나는 무릎을 꿇고 마야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혼해 줄래?’. 바로 ‘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22년 7월 첫 아이가 태어났다. 마야 무어는 현재 '정의와 함께 승리'라는 사회운동 조직을 운영한다. 앞날이 캄캄절벽인 장기수에게 평생을 건 용기. 13년을 기다리며 끝내 그를 구해 낸 진정성. 아름다운 사랑, 더 없이 아름다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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