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캄보디아 오지서 만난 '위안부 피해자' 이남이 할머니…우리말과 과거 잊은 이유는?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오지의 할머니가 기억을 모두 잃어야 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28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오지 할머니의 비밀'이라는 부제로 기억해서 슬프고 잊어서 더 슬픈 훈 할머니의 기억을 조명했다.
업무 차 캄보디아로 갔던 기연 씨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 캄보디아의 오지에서 싯나를 만났다. 대화를 나누게 된 싯나는 자신의 할머니도 한국인이라고 했고, 이에 기연 씨는 할머니를 한번 모시고 오라고 했다.
얼마 후 기연 씨는 종업자 광준 씨와 함께 싯나의 할머니인 훈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짧게 자른 머리, 두꺼운 안경에 큰 눈을 가진 누가 봐도 캄보디아 토박이였다. 심지어 한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할머니는 자신이 한국인이라 주장했다.
아무리 보아도 한국인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할머니. 그렇게 기연 씨와 광준 씨는 할머니와 헤어졌다. 그럼에도 이것도 인연이라 기연 씨는 싯나에게 가사도우미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누가 봐도 한국 사람 같은 싯나의 생활 습관. 싯나는 할머니에게 집안일을 배웠다고 했고, 이에 기연 씨와 광준 씨는 다시 한번 훈 할머니를 만났다. 진짜 한국인이 맞다는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묻자 성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름은 나미라고 했다. 그리고 고향은 진동이라고 서툰 한국어로 말했다.
훈 할머니는 죽기 전에 가족을 꼭 만나고 싶다며 50년 넘게 한국에 못 가고 가족들의 생사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캄보디아에 오게 된 사연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기연 씨 일행은 할머니가 캄보디아에 온 이유를 추측하다 일제 강점기인 1942년에 이국으로 넘어온 할머니가 위안부에 강제 동원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심스럽게 이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 존재했던 일본의 위안소. 아시아 전역을 삼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일본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 어디에든 위안소를 세웠고 그곳에는 당시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여성들을 데려왔다. 특히 이동이 편한 부산항과 가까운 경상도 지역의 여자들이 다수 위안소에 동원되었고 훈 할머니도 그런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이 사연을 법무부와 외교부에 전한 기연 씨 일행. 그러나 법무부와 외교부는 할머니의 존재에 곤란해하며 한국인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했다. 이에 기연 씨 일행은 캄보디아 언론에 할머니 사연을 제보했고 이는 국가 불문 큰 반향을 일으키며 취재 경쟁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할머니가 고향이라고 밝힌 진동이라는 지명의 마을들도 바빠져 할머니의 가족을 찾기에 바빴다. 하지만 수많은 제보 속에서도 할머니의 가족을 찾을 수 없었고, 이에 사람들은 할머니에 대한 의구심만 키웠다.
일부에서는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힌 이유가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는 속셈이 아니냐며 할머니의 의도까지 의심했다. 이에 할머니는 "누가 뭐라 해도 난 한국인, 믿어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라며 "살아서 고향 땅을 한번 밟고 싶다는 것 외에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밝혔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왜 모든 기억을 잃었을까? 할머니의 입을 열기 위해 1993년 UN인권 위원회에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인 김복동 할머니가 나섰다. 당시 공장 취업이라는 말에 속아 끌려간 할머니는 일본의 침략 경로대로 끌려다니며 고초를 겪었다.
그런 김복동 할머니의 등장에 훈 할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훈 할머니는 말로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 사실 증언 시 나타나는 공통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끔찍하게 몸서리치는 표정과 몸짓, 절대 꾸며낼 수 없는 고통의 흔적들이 남아있던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일본군이 찾아와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할머니를 부산항으로 끌고 가 배에 태웠다. 그리고 그곳에는 할머니 같은 여성들이 다수였다.
부산을 떠난 배는 대만을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해 9명의 조선 여자들이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들을 데리고 한 건물로 데려가 한 사람씩 방을 배정해 주었다. 이곳은 바로 일본 위안소.
일본군은 할머니에게 하나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매일같이 찾아와 몹쓸 짓을 했다. 그리고 이후 할머니는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로 끌려갔고 그곳에서도 일본군의 몹쓸 짓은 계속되었다.
할머니에게 칼을 휘두르는 군인도 있었고, 그는 할머니의 몸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1945년 어느 날 다다쿠마 쓰토무가 할머니의 방을 찾았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캄보디아 국왕 경비대를 훈련시키는 책임자였다.
젠틀했던 다다쿠마는 할머니를 자기 집에 데려가기도 했고 반지도 주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점령지를 떠나야 했던 일본군. 이에 일본군들은 위안부를 살해하거나 전쟁터에 방치하고 떠났다.
그러나 할머니가 있던 곳에서는 본국으로 귀국하는 것이 추진되었고 이에 할머니도 귀국선을 타기 위해 항구로 향했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를 다다쿠마가 붙잡았다. 자신은 철수하지 않고 캄보디아에 있겠다며 자신이 지켜줄 테니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했다.
할머니는 다다쿠마의 말을 믿고 캄보디아에 남았다. 하지만 캄보디아를 점령한 프랑스 군인의 눈을 피해 캄보디아의 밀림에 숨었다. 그리고 1946년 다다쿠마의 딸 카오를 낳았고, 그 후에도 할머니는 딸과 함께 밀림에 숨어 지내야만 했다. 그렇게 숨어 지낸 시간만 7, 8년.
기연 씨를 만났던 싯나는 바로 카오의 딸이었다. 하루하루 다다쿠마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던 할머니. 하지만 다다쿠마는 중국인 부인과 결혼을 해 그 사이에서 딸까지 낳아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렇게 할머니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캄보디아에 딸과 홀로 남았다.
그 후 살아남기 위해 모국어도 버리고 조국까지 버리고 캄보디아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할머니. 그렇게 할머니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기억조차 잊어버렸던 것이다.
1997년 당시 아시아대평연합의원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다다쿠마, 그는 한국인 취재진의 방문에 몹시 당황했지만 할머니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할머니와 자신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는 사실만은 끝까지 부정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다다쿠마의 증언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입증한 할머니. 이에 할머니는 1997년 8월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도착한 할머니는 "내 이름은 나미입니다. 혈육과 고향을 찾아주세요"라는 직접 한글로 쓴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한국에 오게 되어 너무 기쁘다며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의 고향 진동을 찾아 헤매던 중 도착한 마산시 진동면. 할머니는 이전과 달리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할머니의 가족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 비자 만료일은 다가오던 그때, 할머니가 가마솥을 보며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김 기자. 할머니는 민속촌에 방문했던 당시 마당에 있던 큰 솥을 보고 반가워하며 "아버지가 마을 남자 몇 하고 솥에 엿을 만들어서 팔았어요"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 주목했던 당시 지역 신문의 사회부 기자 김주완 기자는 마산 진동면에 매일같이 출근을 하며 탐문 취재를 시작했다. 그리고 엿 공장을 했거나 엿장수를 했던 집 다섯 군데를 찾아냈다.
면사무소로 가서 호적부와 제적부 뒤진 김 기자는 그중 가장 유력한 한 집을 찾아냈다. 언니가 있고 둘째 딸이 행방불명인 상태에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는 집. 그 집의 둘째 딸 이름은 바로 이남이였다.
김 기자는 이제 가족들을 수소문했다. 안타깝게도 부모님과 언니는 돌아가시고 남동생도 사망하고 현재는 여동생 이순이만이 살아있었다. 경남 합천에 거주 중인 이순이 할머니를 찾아간 김 기자.
그는 훈 할머니 사진을 가지고 순이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순이 할머니는 훈 할머니의 사진을 보자마자 사진을 끌어안으며 언니라고 울었다.
이에 김 기자는 "핏줄이라는 게 그런 게 있나 봐요. 50년이 흘렀는데도 사진 한 장을 보고 알더라"라며 울컥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시골 깡촌에 살았던 순이 할머니는 훈 할머니에 관한 뉴스를 보지 못했고 이에 어떤 연락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훈 할머니는 순이 할머니와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가 자매라 확신하며 눈물을 흘렸다. 유전자 검사 결과도 일치. 두 사람은 자매가 맞았다.
평생 그리워하던 가족을 찾은 훈 할머니, 아니 이남이 할머니. 둘째 딸을 특히 아꼈던 그의 아버지는 딸의 소식을 끝내 듣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유독 둘째 누나를 따랐던 남이 할머니의 남동생은 끝까지 누나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 5년 전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17살의 소녀가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제야 주민등록증을 받고 영구 귀국을 결정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생활이 쉽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 가장 문제였고, 캄보디아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도 갈수록 깊어져갔던 것이다. 이에 결국 캄보디아로 돌아간 할머니는 2001년 세상을 떠났다.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쥐띠 남자로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던 할머니. 남이 할머니는 남자로 태어나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싶지 않다고 했다.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 소녀 남이, 하나코도 훈도 아닌 이남이,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죄로 가족과 떨어져 이국 땅에 떨어진 여자 남이는 살아남기 위해 모국어는 잊었지만 이름 두 글자와 추억은 잊지 않았다.
방송은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을 만나 가장 행복했던 할머니, 이제는 할머니가 부디 하늘에서 가족들과 고통은 잊고 행복하기를 빌었다.
그리고 여전히 숙제로 남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주목했다. 해방 후에도 바로 알려지지 않은 위안부 문제는 용기를 낸 할머니들의 증언 덕분에 해방 50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그럼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존재 가치가 있으며 그 인격은 존중받아야 한다 마땅함에도 그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위안부 피해자들.
그들은 잘못에 대한 인정과 외면이 아닌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부터 그들의 존엄성을 잊지 말고 기억하기를. 대한민국 사람이면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반드시 사과받는 그날까지 잊지 않아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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