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無知지옥] 투자 사기 피해는 느는데…피해구제 어려워
사기꾼 처벌은커녕 피해자 구제도 어려워
“남이 돈 되는 정보 줄 리 없다는 것 명심”
곗돈과 은행 적금이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스마트폰을 활용한 주식, 가상화폐 매매 등 투자처가 다양해졌다. 그만큼 금융 소비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정신이 바뀌지 않았다. 돈을 다루는 장사를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탓에 그간 우리 사회에서 돈에 대한 얘기는 금기시됐고 금융 교육이 전무했다. 그 결과 3대 사모펀드(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 및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 논란, 라덕연 사태가 터졌다. 반복되는 금융 사고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짚어봤다. [편집자주]
“평소에 의심이 많던 제가 이런 사기에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피해자 특정이 불가능해 수사도 어렵다고 하네요.”
박형서(가명·37)씨는 지난 9월 22일 아버지로부터 두산아이피오닷컴(doosanipo.com)이라는 웹사이트 주소를 전달받았다. 올해 기업공개(IPO) 대어였던 두산로보틱스가 상장하기 2주 전이었다.
해당 웹사이트에 전화번호를 입력하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투자 회사인 ‘나노스탁’ 관계자라고 밝힌 상대방은 400%의 수익을 안겨주겠다며 두산로보틱스 전환사채(CB)에 투자할 것을 권유했다. CB를 우선 매수한 후 두산로보틱스가 상장하면 이를 주식으로 전환해 차익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솔깃해진 형서씨는 나노스탁 측에 320만원을 입금했다. 다음 날 싸한 느낌이 든 형서씨는 나노스탁과의 계약을 취소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형서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형서씨를 포함한 피해자 5명이 4000만원을 편취당했다는 사실만 파악했을 뿐 가해자는 특정하지 못했다. 가해자는 은행 계좌를 불법으로 양도받았고, 사용한 전화번호로 가입한 통신사를 탈퇴해 수사망을 피해 갔다. 신고 2개월 만에 경찰은 수사 불가능 판단을 내렸다.
투자 사기의 수법은 날로 진화 중이지만 피해자 구제는커녕 사기범을 추적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보이스피싱은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인지하면 사기범이 돈을 인출할 수 없도록 계좌를 정지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오래된 사기 수법이라 피해 예방 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투자 사기는 이런 절차가 전무하다. 현행법상 남을 속여 재산을 빼앗은 이에게 최고 무기징역을 선고할 수 있는데, 위 사례처럼 사기범을 특정하지 못하면 무거운 형벌은 무용지물이다.
가장 대표적인 주식 투자 사기는 고급 정보를 주겠다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피해자들을 끌어모아 투자금을 빼돌리는 불법 리딩방(불법 유사투자자문)이다. 최근에는 연예인과 교수, 증권사 대표 등 유명인 사진과 신분을 무단 도용하는 방법으로 발전했다.
아예 가짜 주식투자 홈트레이딩시스템(HTS)·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을 만들어 가짜 수익률과 거래 내역을 보여주며 투자자를 현혹하기도 한다. 상장 주식뿐 아니라 일반 투자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선물, 옵션 등 파생상품이나 CB 투자를 이용한 범죄도 늘었다. 형서씨가 당했듯 IPO를 앞뒀다면서 비상장주식이나 CB를 장외에서 매수할 것을 추천하고 투자금을 가로채는 식이다.
투자 수법이 다양해지고 교묘해지면서 주식 투자 사기의 피해도 급증하고 있지만, 정확한 피해 규모를 집계한 통계조차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가장 빈번한 사기 유형인 불법 리딩방의 경우 최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자료로 대략적이나마 피해 규모가 파악됐다. 국수본에 따르면 올해 1~7월 불법 리딩방 투자 사기의 피해 금액은 약 2400억원, 피해자 수는 9360명이다.
법적으로 주식 투자 사기에 대한 처벌은 약하지 않은 편이다. 사기죄는 형법 제347조로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피해 금액이 5억원 이상일때는 특정경제범죄법으로 가중처벌 받는다. 원금 보장을 약속한 것이 확인된다면 유사수신행위규제법도 적용할 수 있다. 사기로 얻은 이득액이 50억원을 초과하면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벌금도 범죄 행위로 인해 얻은 이익금과 비슷한 수준으로까지 부과될 수 있다.
하지만 처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형서씨의 사례처럼 피의자 특정이 아예 불가능한 경우다. 투자 사기는 인터넷 사행성 범죄처럼 다국적 조직범죄로 이뤄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국제 공조가 필요해 수사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피의자 추적이 어렵다. 텔레그램과 같은 해외에 서버를 둔 메신저를 사용해 피해자에게 접근했다면 국내 수사 기관이 사용자 위치와 인적사항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빼돌린 돈을 해외 이전하거나 세탁한다면 이를 몰수하기도 어렵다.
일례로 지난달 250여명의 피해자에게서 150억원에 달하는 리딩방 사기를 치다 붙잡힌 일당은 범죄 수익금을 다수의 계좌로 분산 이체하고, 이를 즉시 현금으로 뽑아 카지노 등에서 환전하는 수법으로 자금 세탁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이 몰수한 자금은 전체 피해 금액의 10%에 불과한 16억원에 그쳤다.
피해자들이 가해자와 합의해 피해금을 돌려받으면 소를 취하하거나 형사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가 있는 점도 실제 범죄가 처벌까지 이어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법적으로 피해를 사전 차단하기도 어렵다. 보이스피싱과 달리 주식 투자와 관련해서는 사기의심계좌를 즉시 사용 정지할 수 없다. 보이스피싱의 경우 경찰과 금감원, 금융기관 고객센터에 신고가 접수되면 금융기관은 피해자가 돈을 입금한 계좌를 일단 정지시킨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근거한 조치다. 계좌 지급정지 기준을 주식 투자 사기까지 가능하도록 넓히는 개정안이 2021년 5월 발의됐지만, 아직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전문가들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인투자자가 사기에 휘말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투자 시 ▲대면 계약서 작성 ▲투자 권유자의 신분 확인 등 과정을 거치고, 유튜브나 온라인 메신저와 같은 비대면 방식으로 투자를 권유할 경우 이를 무시해 사기꾼의 접근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오성 법률사무소 대연 변호사는 “(피해 예방을 위해) 개인이 범죄에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수익 보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법 위반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타인이 좋은 정보를 본인이 활용하지 않고 남에게 나눠 줄 리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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