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영역] 명나라 장수 진린, 실제론 이순신의 OO였다?
이수진 기자 2023. 12. 29. 06:00
이순신과 진린의 숨은 이야기
"진린은 성격이 포악하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징비록
"사람들이 그의 사나운 성격을 많이 두려워했다" -재조번방지
기록으로 파악되는 진린의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사납고, 포악하고, 안하무인. 그래서 서애 류성룡도 걱정을 많이 했다고 전해집니다. 진린의 군사가 고을 수령을 함부로 때리고 욕하면서 조선 관료의 목에 새끼줄을 매어 끌고 다니길래 영의정 류성룡이 그만하라고 말렸다고 하죠. 그런데도 진린은 말리지 않았습니다. 이걸 보고 류성룡은 "안타깝지만 아무래도 이순신이 (진린에게) 질 것 같다"고 말했고, 주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죠.
━
걱정과 달리 이순신 장군은 진린과 잘 지냈습니다. 진린의 군대가 합류하자, 이순신 장군은 사슴과 멧돼지, 생선 등을 잡아서 성대하게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여기에, 왜군의 머리를 베어서 40여 개를 진린의 몫으로 챙겨줍니다. 그러자 진린은 "이순신은 참으로 뛰어난 장수"라고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하죠. 무슨 일이든 이순신과 함께 상의해서 처리했고 나들이를 갈 때 이순신보다 가마를 앞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순신을 "이야(李爺)" "노야(老爺)"라고 부르며 최고 존칭을 사용했고요. 선조에게 편지를 써서 "이순신은 천하를 다스릴 인재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했죠.
아무리 융숭한 대접을 했다고 해도 안하무인이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온순해진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죠. 덕질의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진린은 수군을 끌고 다시 조선으로 옵니다. 그런데 7개월 넘게 전쟁에서 공을 세우지 못하면서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하죠.
"정벌에 나서서 한 번도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진실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6월 12일
그래서인지 절이도 해전이 끝난 뒤 진린은 거짓 보고를 올렸습니다. 조선 수군과 함께, 자신이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의 보고와는 내용이 엇갈립니다.
진린의 보고: "진 도독이 바다에서 27명의 왜적 머리를 베고, 2명을 사로잡았으며 배 여섯 척을 침몰시켰는데…"
-〈선조실록〉, 선조 31년 8월 4일
이순신의 보고: "중국 군대는 멀리서 적선을 바라보기만 하였고… 진 도독이 공갈 협박을 가하여 마지못해 왜적 머리 40개를 나눠주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8월 13일
이순신의 말대로라면, 진린이 멀리서 보기만 했고 전투가 끝나자 협박을 해서 공을 가로챘다는 건데요. 그런데 이게 소문이 나면서 명나라에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이 내려옵니다. 진린은 잘못이 드러나면 곤란해질 상황이었는데, 여기서 이순신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이순신은 보고서 하나를 따로 올려서 진린이 공을 세운 게 맞다며 진린의 잘못을 덮어줍니다. 7년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데 꼭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거짓 보고를 한 진린을 품고 가기로 한 겁니다. 조선 조정도, 진린의 거짓 보고를 문제 삼지 않기로 하죠. 그러다 보니 진린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 준 이순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순신이 절이도의 전투에서 적의 머리 71급을 베었는데 진 도독이 40급을 빼앗고 계 유격이 5급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도독이 순신에게 독촉하여 다만 26급을 벤 것으로 장계를 꾸미게 하였으므로 순신은 도독의 말대로 26급을 베었다고 거짓 장계를 만들어 보내고 또 별도로 장계를 만들어 사실대로 치계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10월 4일
━
아무튼 이순신은 진린을 다루는 법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밀당의 귀재랄까요. 하루는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이 길을 가다가 조선 백성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진린이 "이들은 어딜 가는 거냐"고 묻자, 이순신은 "명나라 군사들이 하도 노략질을 해서 이주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진린이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면이 안 서잖아요. 그래서 보란 듯이 노략질하는 명나라 군사를 묶어 놓고 때렸대요. 그다음부터는 섬이 조용해지고 백성들의 털끝 하나 건드는 사람이 없어졌대요.
진린은 왜군한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려는 인물로 영화에서 묘사되는데, 이와 관련해서 이순신이 진린에게 어떻게 왜군한테 뇌물을 받을 수가 있냐고 일침을 가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 적은 명나라에서도 용서할 수 없는데, 노야께서는 도리어 뇌물을 받으십니까?" -충무공유사
그러자 그다음엔 왜군의 뇌물을 줘도 진린이 거절했대요. 이미 이순신한테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또 어떻게 받겠냐고 말이죠.
"내가 통제공(이순신)에게서 이미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어찌 거듭 받을 수 있겠습니까?" -충무공유사
진린 보다 이순신이 두 살 어렸는데도 똑 부러지게 할 말은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늘 밀기만 한 건 아니고, 당기기도했는데요. 노량해전을 앞두고 진린이 출전을 반대하고, 왜군에게 빠져나갈 길까지 열어주려고 하자 이때는 이순신이 눈물로 호소해서 진린을 설득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
━
300만 향해 가는 '노량', 가장 눈길 가는 인물은?
━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관객 수 300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전 편인 '명량' '한산: 용의출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군과 왜군뿐 아니라 명나라군의 이야기가 함께 다뤄진다는 겁니다. 7년의 전쟁 끝에 본국으로 퇴각하려는 왜군, 그런 왜군을 곱게 보낼 수 없는 이순신 장군. 그리고 이 사이에 아군인지 빌런인지 아리송한 인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끼어있습니다.
영화 속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은 왜군에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려 해서 이순신 장군에게 방해가 되는 인물처럼 보였지만, 결국 노량해전 끝까지 이순신 옆에 남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진린은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지는데요. 그래서 영화에 담기지 않은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의 이야기를 찾아봤습니다.
━
영화 속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은 왜군에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려 해서 이순신 장군에게 방해가 되는 인물처럼 보였지만, 결국 노량해전 끝까지 이순신 옆에 남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진린은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지는데요. 그래서 영화에 담기지 않은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의 이야기를 찾아봤습니다.
━
진린 도독은 안하무인?
━
"진린은 성격이 포악하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징비록
"사람들이 그의 사나운 성격을 많이 두려워했다" -재조번방지
기록으로 파악되는 진린의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사납고, 포악하고, 안하무인. 그래서 서애 류성룡도 걱정을 많이 했다고 전해집니다. 진린의 군사가 고을 수령을 함부로 때리고 욕하면서 조선 관료의 목에 새끼줄을 매어 끌고 다니길래 영의정 류성룡이 그만하라고 말렸다고 하죠. 그런데도 진린은 말리지 않았습니다. 이걸 보고 류성룡은 "안타깝지만 아무래도 이순신이 (진린에게) 질 것 같다"고 말했고, 주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죠.
━
'이순신 덕후'가 된 이유?
━
걱정과 달리 이순신 장군은 진린과 잘 지냈습니다. 진린의 군대가 합류하자, 이순신 장군은 사슴과 멧돼지, 생선 등을 잡아서 성대하게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여기에, 왜군의 머리를 베어서 40여 개를 진린의 몫으로 챙겨줍니다. 그러자 진린은 "이순신은 참으로 뛰어난 장수"라고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하죠. 무슨 일이든 이순신과 함께 상의해서 처리했고 나들이를 갈 때 이순신보다 가마를 앞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순신을 "이야(李爺)" "노야(老爺)"라고 부르며 최고 존칭을 사용했고요. 선조에게 편지를 써서 "이순신은 천하를 다스릴 인재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했죠.
아무리 융숭한 대접을 했다고 해도 안하무인이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온순해진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죠. 덕질의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진린은 수군을 끌고 다시 조선으로 옵니다. 그런데 7개월 넘게 전쟁에서 공을 세우지 못하면서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하죠.
"정벌에 나서서 한 번도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진실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6월 12일
그래서인지 절이도 해전이 끝난 뒤 진린은 거짓 보고를 올렸습니다. 조선 수군과 함께, 자신이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의 보고와는 내용이 엇갈립니다.
진린의 보고: "진 도독이 바다에서 27명의 왜적 머리를 베고, 2명을 사로잡았으며 배 여섯 척을 침몰시켰는데…"
-〈선조실록〉, 선조 31년 8월 4일
이순신의 보고: "중국 군대는 멀리서 적선을 바라보기만 하였고… 진 도독이 공갈 협박을 가하여 마지못해 왜적 머리 40개를 나눠주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8월 13일
이순신의 말대로라면, 진린이 멀리서 보기만 했고 전투가 끝나자 협박을 해서 공을 가로챘다는 건데요. 그런데 이게 소문이 나면서 명나라에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이 내려옵니다. 진린은 잘못이 드러나면 곤란해질 상황이었는데, 여기서 이순신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이순신은 보고서 하나를 따로 올려서 진린이 공을 세운 게 맞다며 진린의 잘못을 덮어줍니다. 7년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데 꼭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거짓 보고를 한 진린을 품고 가기로 한 겁니다. 조선 조정도, 진린의 거짓 보고를 문제 삼지 않기로 하죠. 그러다 보니 진린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 준 이순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순신이 절이도의 전투에서 적의 머리 71급을 베었는데 진 도독이 40급을 빼앗고 계 유격이 5급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도독이 순신에게 독촉하여 다만 26급을 벤 것으로 장계를 꾸미게 하였으므로 순신은 도독의 말대로 26급을 베었다고 거짓 장계를 만들어 보내고 또 별도로 장계를 만들어 사실대로 치계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10월 4일
━
밀당의 귀재
━
아무튼 이순신은 진린을 다루는 법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밀당의 귀재랄까요. 하루는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이 길을 가다가 조선 백성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진린이 "이들은 어딜 가는 거냐"고 묻자, 이순신은 "명나라 군사들이 하도 노략질을 해서 이주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진린이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면이 안 서잖아요. 그래서 보란 듯이 노략질하는 명나라 군사를 묶어 놓고 때렸대요. 그다음부터는 섬이 조용해지고 백성들의 털끝 하나 건드는 사람이 없어졌대요.
진린은 왜군한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려는 인물로 영화에서 묘사되는데, 이와 관련해서 이순신이 진린에게 어떻게 왜군한테 뇌물을 받을 수가 있냐고 일침을 가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 적은 명나라에서도 용서할 수 없는데, 노야께서는 도리어 뇌물을 받으십니까?" -충무공유사
그러자 그다음엔 왜군의 뇌물을 줘도 진린이 거절했대요. 이미 이순신한테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또 어떻게 받겠냐고 말이죠.
"내가 통제공(이순신)에게서 이미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어찌 거듭 받을 수 있겠습니까?" -충무공유사
진린 보다 이순신이 두 살 어렸는데도 똑 부러지게 할 말은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늘 밀기만 한 건 아니고, 당기기도했는데요. 노량해전을 앞두고 진린이 출전을 반대하고, 왜군에게 빠져나갈 길까지 열어주려고 하자 이때는 이순신이 눈물로 호소해서 진린을 설득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
우정은 현재진행형
━
진린 도독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의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고 하죠. 그걸 본 명나라 군사들도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진린은 명나라로 돌아갑니다. 진린과의 인연, 이렇게 끝났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진린의 후손들이 이후 조선으로 와 정착한 건데요.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세워지면서 진린의 손자가 "오랑캐가 세운 나라에선 못 살겠다"며 조선으로 이주해 정착한 겁니다. 그렇게, 진린은 우리니라 광동 진씨의 시조가 되죠. 이순신의 후손인 덕수 이씨 가문과도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전라남도 묘도에 가면 진린을 기리는 사당이 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언급했듯이, 이순신과 진린은 한중문화교류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명나라 장군 등자룡과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하였으며, 명나라 진린 장군의 후손은 오늘까지도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2014년, 서울대 강연 중)
■ 인물탐구영역
인물을 알면 맥락이 보입니다. 화제가 되는 인물의 스토리를 발굴해 매주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
진린 도독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의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고 하죠. 그걸 본 명나라 군사들도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진린은 명나라로 돌아갑니다. 진린과의 인연, 이렇게 끝났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진린의 후손들이 이후 조선으로 와 정착한 건데요.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세워지면서 진린의 손자가 "오랑캐가 세운 나라에선 못 살겠다"며 조선으로 이주해 정착한 겁니다. 그렇게, 진린은 우리니라 광동 진씨의 시조가 되죠. 이순신의 후손인 덕수 이씨 가문과도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전라남도 묘도에 가면 진린을 기리는 사당이 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언급했듯이, 이순신과 진린은 한중문화교류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명나라 장군 등자룡과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하였으며, 명나라 진린 장군의 후손은 오늘까지도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2014년, 서울대 강연 중)
■ 인물탐구영역
인물을 알면 맥락이 보입니다. 화제가 되는 인물의 스토리를 발굴해 매주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
Copyright © JTBC.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JTBC에서 직접 확인하세요. 해당 언론사로 이동합니다.
- [백브RE핑] '전가의 보도' 거부권…김건희 특검법 앞둔 빌드업?
- 이선균 협박해 5천만원 뜯은 20대 여성 구속..."도주, 증거인멸 우려"
- "중대범죄 혐의자" 쏘아대던 한동훈...이재명 오늘 예방
- [사반 제보] 버스 빈자리에 짐 놓은 승객...치워달라하자 '민원 접수'
- [인물탐구영역] 명나라 장수 진린, 실제론 이순신의 OO였다?
- [단독] 명태균 "국가산단 필요하다고 하라…사모한테 부탁하기 위한 것" | JTBC 뉴스
- 투표함에 잇단 방화 '충격'…미 대선 앞두고 벌어지는 일 | JTBC 뉴스
- 기아의 완벽한 '결말'…우승에 취한 밤, 감독도 '삐끼삐끼' | JTBC 뉴스
- "마음 아파도 매년 올 거예요"…참사 현장 찾은 추모객들 | JTBC 뉴스
-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금 20돈 발견한 경비원이 한 행동 | JTBC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