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신고했다 간첩 몰린 항일운동가... 51년 만에 누명 풀렸다

최다원 2023. 12. 29.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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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월 29일 서울.

그날 석간신문 사회면 간첩단 체포 기사엔 아버지 백대윤씨의 사진이 정말로 떡하니 박혀 있었다.

생면부지 남성이 계속 접근하는 걸 수상하게 여긴 대윤씨는 보안사에 그를 신고했는데, 결국 정체는 간첩으로 드러났다.

보안사가 신고자 대윤씨를 간첩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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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보안사 주도한 간첩단 사건 재심
제보했다가 누명 쓴 백대윤씨 무죄 판결
숨진 부친 대신 아들이 대 이어 명예회복
1972년 백대윤씨가 육군보안사령부에 검거돼 작성한 진술서. 백씨 측 제공
"29일 육군보안사령부는 무력유격활동으로 현정부를 뒤엎고 비상사태 하에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민중봉기를 획책하려던 대남간첩 7개망 23명을 서울ㆍ대구 등지에서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1972년 1월 29일 주요 신문 사회면 기사)

1972년 1월 29일 서울. 28세 회사원 백수일씨는 출근 직후 하늘이 내려앉는 듯한 소식을 들었다. 대구에 계신 아버지가 간첩 혐의로 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갔다는 전언이었다. 그날 석간신문 사회면 간첩단 체포 기사엔 아버지 백대윤씨의 사진이 정말로 떡하니 박혀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아버지가 간첩이라니.

'백대윤'이란 이름엔 이날부터 용공분자(공산주의 동조자)라는 주홍글자가 붙었다. 이 주홍색 낙인을 아버지 생전에 다 지우지 못했다. 숨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수일씨는 백방으로 노력했고, 결국 이달 21일 재심을 통해서야 51년 만에 겨우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아버지 걱정에 잠 못 이루던 청년은 79세 백발노인이 됐다.


신고자에 간첩 누명 씌운 보안사

부자의 인생을 반세기 동안 지배한 간첩단 사건은 아버지 대윤씨가 63세이던 1971년 10월 27일 시작됐다. 그의 앞에 나타난 임창술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이북 출신'이라고 소개하며, 전쟁통에 월북한 대윤씨 남동생 2명의 근황을 알려주고 사라졌다. 그 후에도 임창술은 또다시 대윤씨를 찾았다. 생면부지 남성이 계속 접근하는 걸 수상하게 여긴 대윤씨는 보안사에 그를 신고했는데, 결국 정체는 간첩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보안사가 신고자 대윤씨를 간첩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한 것. 처음에 보안사는 포상금까지 주며 대윤씨를 칭찬하다가, 갑자기 "당신이 임창술의 지하당 조직사업에 동조한 게 아니냐"며 추궁하기 시작했다. 변명도 소용없었고, 결국 대윤씨는 이듬해 1월 13일 악명 높던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도 가해졌다. 수일씨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셨을 때 보니, 온몸의 피부가 뱀 허물 벗었을 때 껍질처럼 (피멍으로) 얼룩덜룩했다"고 회고했다.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가 아버지를 표적으로 삼은 배경을 수일씨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월북한 식구가 있으면 가족 전부가 간첩으로 의심받던 시대였다. 더욱이 대윤씨는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에서 지역구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니, 박정희 정권 눈 밖에 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들이 51년 만에 한풀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서울고법.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렇게 검찰에 넘겨진 대윤씨는 1972년 3월 반공법 위반(회합통신) 혐의로 기소됐다. 4개월 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2년을 받고 항소했으나 기각됐다. 그 과정에서 보안사가 구속영장 신청 일자를 맞추기 위해 검거 날짜를 조작하고 수사 서류 명의를 위조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억지 누명이 백씨 가문에 남긴 상처는 끔찍했다. 대윤씨 남동생은 한국에서 더 이상 변호사 생활이 어렵겠다고 판단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학창 시절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대윤씨는 나중에 독립운동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이 사건 탓에 신청자 6명 중 홀로 탈락했다. 199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시대가 바뀌고 국가 폭력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후에야 간첩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됐다. 아들 수일씨는 지난해 6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문을 두드렸고 "수사 과정에 위법행위가 있었다"는 결론을 받아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부장 정진아) 심리로 열린 재심에서 검찰도 "당시 피고인(대윤씨)의 행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구형했고, 재판부도 무죄를 선고했다.

아버지의 누명은 벗겼지만, 아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명예를 보다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 수일씨는 형사보상과 국가배상도 청구할 계획이다. 이 사건을 대리한 법무법인 해송의 문동주 변호사는 "늦었지만 정의에 부합하는 결과"라면서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또 다른 피해자들이 용기를 얻기 바란다"고 전했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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