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서울의 봄’은 영원한 현재

이동현 평택대 총장 2023. 12. 2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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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 가면 쓴 세력들 경계, 잘못엔 엄중한 단죄 절실
미래 좌우할 일 방관 안 돼…불행한 미래 지금 막아야
이동현 평택대 총장

1979년 12·12 군사반란의 9시간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화제다. 극 중 ‘전두광’의 악행을 보고 높아진 심박수를 공개하는 ‘심박수 챌린지’가 유행하더니, 지금은 영화계, 문화계는 물론 정치권까지 각종 논평이 쏟아져 나온다.

영화의 구도는 단순하다. 반란군과 진압군이 맞서 9시간 동안 공격과 수비를 숨 가쁘게 이어가는 것이다. 주인공으로 보면 전두광(전두환)과 이태신(장태완)의 ‘맞짱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인물이 각자 독특한 캐릭터를 보이며 영화의 재미를 더하는 역사극이다.

한국 역사는 반란과 혁명의 역사다. 어떻게 보면 모든 역사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신라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나선 ‘궁예의 반란’에서 ‘12·12’에 이르기까지 반란과 혁명의 여정이 우리 역사를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 묘청의 반란, 무신 쿠데타, 이성계의 회군, 조선시대 들어 임꺽정과 정여립의 반란,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홍경래의 난,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농민전쟁까지 끝없이 이어진다.

수많은 주인공이 등장하고, 성공과 실패의 사례가 있지만, 그 저변에는 북진정책과 사대정책, 보수와 개혁, 봉건과 근대의 시대정신이 다투고 있는 것이다. 궁예라는 개인에만 초점을 맞추면 궁예의 난폭성과 정신병이 부각되겠지만, 이 반란이 내포하고 있는 북진자주정책의 시대정신을 놓치게 된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도 전두광에 분노하게 되면, 무력감과 자괴감, 패배와 좌절로 그치게 된다. 미래에 대한 교훈은 없게 된다.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어떤 교훈을 얻어 어떻게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구본형은 명저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 “지금 우리는 미래를 수정할 수 있는 ‘현재’라는 자리에 와 있다. 마치 현재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시점인 과거로 돌아와 있는 것 같다. 불행한 미래는 지금 막아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1984년은 2029년에서 볼 때 과거가 아닌 미래다. 미래가 과거보다 먼저 존재하고, 미래와 과거는 혼용된다. 그렇게 보면 12·12는 과거가 아니고 미래가 된다.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는 이 미래를 치유하고 수정할 수 있는 현재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현재를 사는 우리는 미래를 결정하는 일들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현재는 미래를 치유할 수 있는, 기술적으로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치유하고 수정하고 경계해야 할까.

첫째,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하나회’와 같은 특정한 집단이 사익을 위해 공의를 저버렸다는 점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공익으로 분장하고 실제로는 사익을 추구하는 많은 집단과 세력들이 있다. 이런 집단과 세력을 경계하고 저항해야 한다. 군사반란군 진압 과정에서 전사한 김오랑과 정선엽, 끝까지 진압에 최선을 다했던 장태완과 정병주가 있었기에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하나회’ 척결에 성공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역사는 엄중해야 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은 1995년 12월 내란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으나, 1997년 12월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불완전한 단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국군의 명예훼손, 남남갈등, 사면의 불공정성 논란 등으로 현재까지 부작용이 남아 있다. 공정과 정의가 살아 있는 단죄가 이루어져야 한다. ‘서울의 봄’에 이어 상영되고 있는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은 “이렇게 적들을 살려 보내서는 올바로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외친다.

셋째, 절박감이 있어야 한다. 반란군은 권력을 잡기 위해 죽기 살기로 나서고 있는 반면 진압군은 시종일관 끌려다니기만 한다. 반란군은 떼거리를 몰고 현장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진압군은 전화만 돌리고 있다. 진압군은 적당히 사태를 무마하고 종결하려고 하는데, 반란군은 온갖 묘수를 짜내며 이를 악물고 덤벼든다. 섣부른 화해와 용서가 진정한 화해와 용서에서 멀어지는 장면은 역사에서 여럿 있다.

넷째, 반란군의 쿠데타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역사적 사실로는 실패한 것이다.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군사정변은 다음 해 5월 17일 계엄에 이르기까지 반년에 걸친, 세계에서 가장 긴 쿠데타에 불과하다. 비록 1980년의 민주화운동이 계엄과 무력진압으로 일시적으로 좌절되어 당장은 실패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이로부터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1987년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전국민적인 민주항쟁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숨으로는 실패와 패배로 보일지 몰라도, 긴 호흡으로 보면 결국은 성공과 승리인 것이다.


1979년 과거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은 우리에게 묻는다. 미래를 실패의 역사로 만들지, 성공의 역사로 만들지. 현재의 우리가 선택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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