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상’ 소설가 최인호… 이 극장은 그에게 헌정하는 무대
“되게 재밌어하셨어요. 자네가 그런 줄 알았으면 ‘겨울 나그네’ 주인공 이름을 ‘민우’가 아니라 ‘동우’로 했을 텐데, 그러셨죠.”
‘타인의 방’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깊고 푸른 밤’ ‘고래사냥’…. 올해 10주기를 맞은 소설가 고(故) 최인호(1945~2013)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무대 미술가 박동우(61) 홍익대 교수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1997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뮤지컬 ‘겨울 나그네’ 초연을 올린 뒤, 1999년 창작진들이 함께 미국을 여행했을 때 박 교수는 원작자인 최인호 소설가와 방을 함께 썼다. 그때 “선배님이 제 인생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분”이라고 하자 최인호가 껄껄걸 웃으며 한 말이었다.
‘명성황후’ ‘영웅’ 등을 만든 뮤지컬 제작사 에이콤의 윤호진 예술감독이 만든 뮤지컬 ‘겨울 나그네’가 서울 양재동 한전아트센터에서 3번째 시즌 무대에 오르고 있다. 2005년 서울 남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재연에 이어 이번 3연까지 모두 무대는 박 교수가 맡았다. “작품을 하면서 ‘아, 이런 게 인연이구나’ 생각했죠. 어릴 적부터 우상이었던 최인호 선생을 이렇게 만나는구나.” 그는 44세에 이미 이해랑연극상을 받은 우리 연극 최고의 무대 미술가 중 한 명. 1987년 극단 ‘산울림’의 연극 ‘숲속의 방’으로 데뷔한 뒤, 쉬지 않고 한 해 10편 넘는 작업을 했고, 공연계의 웬만한 무대미술상을 다 휩쓸었다.
경북 청송에서 태어난 문학 소년 박동우는 중학생 때부터 최인호의 소설에 푹 빠졌다. “책 읽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던 시절이었어요. 영화로도 만들어진 최인호 선생의 소설을 찾아 읽다가 단편집 ‘타인의 방’에 이르렀을 땐 진짜 충격이었죠. 다른 소설들이 구상 회화라면 ‘타인의 방’은 추상 미술, 연극으로 치면 부조리극 같았다고 할까요.” 소년은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의 최인호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세대 영문과를 나온 최인호의 뒤를 따라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최인호가 활동했던 동아리 연희극회(연세극예술연구회)에서 무대미술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대학 시절엔 신입생 때 최인호가 극회 연습에 사과 한 상자를 사들고 찾아온 모습을 먼발치에서 본 것뿐이었다. 그랬던 최인호의 소설이 처음 뮤지컬화될 때, 무대미술을 박 교수가 맡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술을 좋아하실 뿐 아니라 노래도 잘하셨어요. 오페라 ‘사랑의 묘약’ 속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잘 부르셨죠. 멋드러지게 노래하시고 나면 ‘우리 땐 이런 노래 정도는 불러줘야 됐어’ 하며 호탕하게 웃으셨죠.”
뮤지컬 ‘겨울 나그네’의 무대는 박동우답다.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관객은 ‘우아~’ 감탄사를 연발한다. 황금빛 액자가 엇갈려 가득 채운 무대 위, 새하얀 자작나무 숲에 눈이 내리고 있다. 압도적이다. 만약 최인호 선생이 이 무대를 볼 수 있다면 어떤 말씀을 듣고 싶은지 물었다. “초연 때도 무대가 참 좋다고 칭찬만 한참 하셨어요. 이번 무대를 보시면 ‘저번보다 훨씬 낫네’ 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그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겨울 나그네’는 의대생에서 범죄자가 된 민우, 민우를 오래 기다렸던 성악과 여대생 다혜, 둘을 지켜봐준 민우의 친구 현태, 민우를 사랑한 동두천 기지촌 나이트클럽의 여가수 제니의 엇갈린 운명과 사랑 이야기. 사춘기 소년 같은 이상적 사랑에 대한 갈망, 어두운 폭력의 세계 같은 대중문화적 상상력 등 최인호다운 여러 요소들이 흠뻑 녹아있다. “초연과 재연 때는 무대 위 액자가 하나뿐이었는데 이번에 두 개의 액자가 엇갈리는 무대를 처음 세웠어요. 주인공 네 사람의 엇갈리는 운명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시점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죠. 자연스럽게 깊이가 모자라는 무대를 더 깊어 보이도록 만들 수 있었어요.”
뮤지컬 도입부에서 관객이 가장 처음 만나는 것도, 마지막 엔딩에서 만나는 것도 자작나무숲. 원작에도 없는 박 교수의 아이디어다. “주인공이 모두의 마음속에서 떠나는 장면이잖아요. 어디로 떠나는 게 좋을까. 눈 내리는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눈 내리는 숲이라면 역시 자작나무 숲이죠.” 극 중 대학 캠퍼스 모습은 연세대 본관 건물을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여주인공 ‘다혜’가 슈베르트 가곡 ‘겨울 나그네’를 부르는 모습을 ‘민우’가 처음 지켜보는 다혜의 집은 투명한 건물에 담쟁이 넝쿨뿐. 박 교수는 “젊은 시절엔 압축하는 방법을 몰랐다. 초연 때에 비하면 세트에 사용되는 자재 양이 5분의 1 정도밖에 안 될 것”이라며 “그만큼 이제는 덜어내고 비워내며 핵심적 정서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도 했다.
“예전엔 참 엇갈리기 쉬웠어요. 집에 온 전화만 안 바꿔줘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잖아요. 한 번 엇갈리면 그게 운명이 돼 버렸죠. 젊은 청춘들이 목숨까지 바칠 듯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엇갈린 운명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런 슬픔과 아픔이 이 뮤지컬에는 있습니다. 그걸 보는 것 자체로, 요즘과는 달랐던 그 시절 사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뮤지컬 ‘겨울 나그네’ 공연은 내년 2월 25일까지.
박 교수는 여전히 우리 공연계에서 가장 바쁜 무대 미술가다. 27~29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리는 국립국악원 송년 공연 ‘나례(儺禮)’는 구성·연출까지 맡았다. 고려부터 조선까지 700여 년간 행해졌던 섣달 그믐밤 궁 안에서 펼쳐지는 가장 화려한 새해맞이 의식을 국립국악원 정악단, 민속악단, 무용단이 함께 무대에 올린다. 29~31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펼쳐지는 국립극장 연말기획공연 ‘세종의 노래 : 월인천강지곡’ 무대도 박 교수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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