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정권 심판 對 86 운동권 심판
윤석열 대통령과 이준석은 결국 결별했다. “대통령과 당의 변화가 없다면 12월 27일 탈당하겠다”고 예고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끝내 잡지 않았다. 형식은 탈당이지만 사실상 ‘출당’이다.
지난달 이 지면에서 이렇게 썼다. “이준석 탈당 가능성은 하루에 1%씩 올라가고 있다. 이준석 전 대표의 선택지는 세 가지다. ①이준석 신당 ②국민의힘 잔류 ③제3 지대 정당 합류. 현 시점에 ①50% ②30% ③20% 정도로 보인다. 12월까지 김기현 체제가 유지된다면 이준석 탈당 가능성은 90% 이상으로 높아질 것이다. 김기현 체제가 붕괴하고 비대위로 전환한다면 탈당 가능성은 30%까지 떨어질 것이다.” 오판이었다. 이준석의 탈당 의지보다 윤석열의 출당 의지가 훨씬 강했다.
보수 정당 역사상 파격의 ‘30대 대표’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새드 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이준석 대표 시절’은 훗날 두고두고 입에 오를 것이다. 언젠가는 그의 공과가 냉정하게 평가받는 날이 올 것이다. 그가 많은 비판을 받은 것을 알고 있고 그 비판이 꽤 근거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준석 대표의 공과를 써 내려간다면 과의 줄이 훨씬 길 수도 있겠지만 무게를 달아보면 공 쪽으로 기울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돌이켜보면 박근혜·윤석열 두 대통령을 만들고 보수 정당의 당대표가 된 순간이 이준석의 찬란한 ‘화양연화’일 것이다. 그는 박근혜 비대위 합류로 정치에 들어온 12월 27일, 바로 그날 자신의 정치적 고향 상계동에서 탈당을 선언했다.
“제 고향 상계동을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평균적인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 노력하는 사람들의 도시, 가진 것이 많기보다 꿈꾸는 미래가 많은 사람들의 도시입니다. (…) 저는 오늘 국민의힘을 탈당합니다. 국민의힘에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정치적 자산을 포기합니다. (...) 이제 시민 여러분께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검투사의 검술을 즐기러 ‘콜로세움’으로 가는 발길을 멈춰 주십시오. 시민 여러분께서 수고롭지만 ‘아고라’에 오셔서 공동체의 위기를 논의하는 책임 있는 정치인들에게 성원을 보내주십시오.”
이준석이 나간 자리에 한동훈이 들어왔다. 이준석 대표가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 승리를 이끌었듯 한동훈 비대위원장도 총선 승리를 이끌 수 있을까. 이준석이 탈당하기 전까지 국민의힘 시나리오는 네 가지였다. ①최선 : 이준석도 남고 당이 혁신하는 것 ②차선 : 이준석은 나가고 당은 혁신하는 것 ③차악 : 이준석은 남고 당 혁신은 없는 것 ④최악 : 이준석도 나가고 당 혁신도 없는 것. 이제 ②와 ④만 남았다. 한동훈은 ‘이준석 출당을 후회하지 않을’ 혁신을 할 수 있을까.
“저만의 ‘NeXTSTEP’을 걷겠습니다. 변화와 승리에 대한 확신을 두고 이 길을 즐겁게 걷겠습니다”라는 이준석의 다짐은 ‘좋은 경쟁자’ 한동훈과 벌일 경쟁이 자신 있다는 선언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대한민국의 위기 속에서도 상대를 악으로 상정하고 청산하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그 방향으로 시민들을 이끌려고 합니다. (...)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왜 적장을 쓰러뜨리기 위한 극한 대립, 칼잡이의 아집이 우리 모두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까?”라는 말은 누가 봐도 윤석열과 한동훈을 겨냥한 것이다. ‘콜로세움’에서 싸우는 한동훈과 ‘아고라’에서 토론하는 이준석 이미지는 극적으로 대비된다.
정치의 무기인 ‘말’과 ‘글’은 한동훈도 이준석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상식적인 많은 국민들을 대신해서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과 그 뒤에 숨어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운동권 특권 세력과 싸울 겁니다. 호남에서, 영남에서, 충청에서, 강원에서, 제주에서, 경기에서, 서울에서 싸울 겁니다. 그리고 용기와 헌신으로 반드시 이길 겁니다. (...) 여러분, 동료 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줄 사람과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함께 가면 길이 됩니다. 우리 한번 같이 가 봅시다.”
한동훈 위원장은 ‘윤석열 정권 심판’의 선거 구도를 ‘586 청산’ 구도로 바꿀 수 있을까. 어려운 숙제다.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은 우리가 운동권 특권 정치를 대체할 실력과 자세를 갖춘 사람들이라고 공동체와 동료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청산 대상’보다 ‘청산 주체’가 중요한 핵심이다. 친일·쿠데타·독재의 굴레에 엮일 수 있는 ‘올드 라이트(Old Right)’나 변절·배신 덫에 빠질 수 있는 ‘뉴라이트(New Right)’는 ‘586 청산’ 주체가 될 수 없다.
자유주의·개인주의로 무장한 ‘넥스트 라이트(Next Right)’가 청산 주체가 되는 것이 역사적 순리다.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시대와 함께 온다. 그 순간 지금껏 가치 있었던 것이 한순간에 낡아서 쓸모없게 보인다. 1973년생 한동훈과 1985년생 이준석의 경쟁은 ‘민주당 586 세대’를 순식간에 낡고 늙게 보이게 할 것이다. ‘강남 8학군’ 출신 한동훈과 ‘상계동’ 출신 이준석 모두 ‘강남 우파’ 이미지를 갖고 있다. ‘586 청산’은 ‘강북 우파’ 이미지의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강남 우파’의 몫이다.
어둠이 물러가서 해가 뜨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뜨기 때문에 어둠이 물러가는 것이다. 검사와 운동권 모두 상대를 ‘죽일’ 적으로 보는 전쟁의 언어에 익숙하다. 칼을 들고 상대를 죽이는 ‘콜로세움’의 정치다. 정치와 전쟁의 차이는 퇴로를 열어주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상대를 말과 글로 ‘이길’ 경쟁자로 보는 ‘아고라’의 정치를 볼 수 있을까.
한동훈 위원장은 하루빨리 검사의 언어를 버려야 한다. 정치의 본령은 말로 싸우는 것이다. 말과 글이 뛰어난 한동훈과 이준석의 경쟁이 정치를 콜로세움에서 아고라로 옮겨 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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