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알바니아, 범죄국가 편견 깨다
천개의 창이 있는 베라트서 건축물 구경
‘돌의 도시’ 지로카스터르선 뷰 맛집 탐방
공산주의 시절 뒤로… 천혜 자연 눈호강
지난 10월, 2주간 알바니아를 여행했다. 알바니아에 간다고 하니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들어야 했다. 왜 알바니아야? 알바니아에 뭐가 있어? 나 또한 알바니아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알바니아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마더 테레사의 국적을 두고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가 서로 자국이라며 우긴다는 사실 정도였다. 사실 마더 테레사의 국적을 정확히 따진다면 ‘지금은 북마케도니아의 영토가 됐지만 오스만 제국의 변방이었던 곳에서 태어나 알바니아계 부모님 밑에서 자란 수녀’란다. 여행지로 알바니아를 선택한 이유를 굳이 꼽는다면 오래전에 봤던 영화 ‘테이큰’ 덕분이다. 영화에서 알바니아가 잔악무도한 범죄집단으로 그려지는 걸 보며 언젠가 알바니아를 여행하며 직접 사람들을 만나보겠다고 다짐했으니.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찾아간 알바니아는 여러 면에서 내 마음을 흔들었다. 우선 10월 중순인데도 25도를 넘나드는 온화한 날씨에 반했다. 하긴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에게해를 접한 나라니 유럽의 남쪽으로 꽤 내려온 셈이었다. 또 물가가 저렴하고 마주치는 사람들이 친절했다. 몸과 마음을 두루 편하게 만드는 도시였다.
심하게 무지한 상태였기에 티라나에서는 알바니아의 현대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주로 찾아다녔다. ‘벙크 아트 2’와 ‘나뭇잎의 집 박물관’ 같은 곳이었다. 40년 이상 알바니아를 통치했던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공산주의 시절, 적대세력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감시와 도청, 불법 체포와 고문, 재판 없는 사형 등이 행해졌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가혹한 과거를 기억할 수 있게 해놨다. 심지어 독재정권에서 비밀경찰로 일했던 이들의 이름과 직책, 얼굴 사진까지도 전시하고 있었다.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과거의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존경스러웠다.
알바니아의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에 들른 두 개의 도시는 내가 멋대로 ‘트윈 시티’라고 이름을 붙였다. 베라트와 지로카스터르. 닮은 듯 서로 다른 도시였다. 독특한 건축물로 두 곳 모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베라트는 집집마다 찍어낸 듯 네모난 창이 독특해 ‘천 개의 창을 가진 도시’로 불린다. 기독교 도시로 시작해 유대인 공동체도 거주했고 그 후 무슬림 다수가 된 도시다. 베라트에서는 꽤 오랫동안 기독교도, 유대인, 무슬림이 사이좋게 공존해 왔다. 나치의 기세가 서슬 퍼렇던 시절에는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집과 지하실에 유대인들을 숨겨줬다고 한다. 1944년 이 도시에서 알바니아 민족협의회가 열리고 엔베르 호자가 총리가 됐다. 그 후 도시의 운명은 달라졌다. 1950년대부터 이 마을은 공공의 적으로 간주된 이들의 유배지가 됐으니 말이다. 노벨상 후보에 오른 알바니아의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도 이곳에서 2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허가 없이는 마을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는 정치범 수용소였다고 한다.
지로카스터르는 지붕을 덮은 납작한 회색 돌 때문에 ‘돌의 도시’로 불리는데 서로 적대적이었던 두 인물이 태어난 곳이다. 회칠을 하고 돌로 지붕을 인 전통 가옥에서 독재자 엔베르 호자가 태어났고 28년 후 걸어서 4분 거리의 골목에서 ‘죽은 군대의 장군’을 쓴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태어났다. 호자는 자기가 나고 자란 이 도시를 ‘박물관 도시’라는 이름을 선포해 도시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그래서일까. 이 도시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알바니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호자의 동상이 철거됐다. 카다레는 평생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조국 알바니아의 암울한 현실을 소설로 그려내 세계적 작가가 된 인물이다.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호자의 집을 볼 때마다 소설의 줄거리가 하나씩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지로카스터르 요새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는 순간, 탄성이 터졌다. 뭐 이렇게 예쁜 도시가 있담. 마음에 쏙 드는 도시였다. 작은 마을이어서 어디든 걸어 다닐 수 있는 점도 좋았다. 골목마다 테이블이 놓인 카페와 식당이 이어졌다. 소박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맛이 가득했다. 엔베르 호자의 생가는 민속박물관이 됐는데, 호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고 깔끔하게 복원한 옛 주택이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선 이후 10% 넘는 극심한 실업률과 30%에 가까운 빈곤율로 인해 알바니아 사람들 사이에는 공산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교육과 의료, 주택이 무상으로 제공됐고 여성의 지위도 높았다면서. 이런 현상에 대해 이스마엘 카다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공산주의 시절의 극단적인 폐쇄 정책과 어려운 경제는 사람들에겐 재앙이었지만 자연에는 축복이었던 걸까. 알바니아에는 놀랍도록 깨끗한 자연이 살아있었다. 티라나를 벗어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푸른 산이, 남쪽으로 내려가면 맑은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먼저 북부의 프로클레티예 산맥으로 올라가 알바니아의 아름다운 가을 산을 누렸다. 산이 얼마나 험했으면 이름이 ‘저주받은 산’일까. 그 험한 산을 비바람 부는 날 넘느라 고생도 좀 했지만 완벽한 날씨가 이어져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산에서는 단풍이 한창인 늦가을 분위기를 누리다가 바닷가로 내려오니 여름의 끝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사란더에서 머문 숙소는 방 다섯 개짜리 작은 호텔인데, 두 아들을 그리스와 두바이로 유학 보낸 부부가 직원도 없이 꾸려 가고 있었다. 구글 리뷰가 좋은 숙소였는데 방에서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디저트까지 안주인 마리아가 직접 만들어 차려주는 아침 식사도 훌륭했다. 숙소의 식당에서 바로 해변이 이어져 저녁 노을을 보며 앉아 있거나 해 질 무렵 해변을 산책하기에도 좋았다. 다만 그 아름다운 해변 대부분이 ‘프라이빗 비치’여서 감동을 반감시켰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중 하나가 해변이 누군가의 사적인 소유가 되는 일이다. 알바니아의 해변은 호텔과 카페와 식당이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땅 따먹기라도 하듯 모래사장 위로 펜스를 쌓아 올린 풍경이 서글펐다. 공산주의 시절에는 적어도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더 나은 알바니아로 향하는 과도기의 부작용이기를 바랄 뿐.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모든 선과 경계가 사라진 해변에서 모두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풍경과 마주치게 되기를 바라며 알바니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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