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보신각 종소리
일제강점기인 1932년 12월 경성방송국은 일본의 여러 방송국과 함께 제야의 종을 릴레이로 송출하기로 했다. 본래 취지가 각 지역을 대표하는 종소리로 한 해를 시작하는 데 있었기에 경성방송국은 오랫동안 서울의 시간을 알린 보신각종을 생각하고 종의 관리를 담당한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신청서를 제출한 뒤 허가를 기다렸다. 그러나 암초는 다른 곳에 있었다. 경무국은 방송국을 관할하는 체신국에 압력을 행사해 종의 사용을 불허토록 했다. 결국 이 해의 행사는 밤 11시55분 도쿄 간에이지(寬永寺) 타종을 시작으로 구마모토, 나고야, 센다이, 히로시마 등의 사찰을 거쳐 0시25분 서울에서는 보신각종 대신 일본인 사찰인 혼간지(本願寺)의 종이 울렸고 5분 뒤 나라 도다이지(東大寺)의 종소리로 끝이 났다. 릴레이 타종행사는 이 뒤로도 한동안 계속됐으나 보신각종은 끝내 나오지 못했다. 이미 경성방송국보다 앞서 1928년 시내 상인들로 이뤄진 중앙번영회도 500원을 들여 보신각을 개수하고 개점과 폐점시간을 알리려고 했으나 이 역시 허가받지 못했다.
대한제국 시대까지 보신각종은 서울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밤 10시 하루를 마치며 33번을, 새벽 4시 새날을 열며 28번을 쳤다. 이를 인경(人定)과 파루(罷漏)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신각종을 '인경'이라고도 했다. 국권 피탈 직전 정부는 보신각이 낮은 곳에 있는 데다 단층인 까닭에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지 못한다며 고층으로 새로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뒤 오포(午砲)가, 이어 사이렌이 종의 시보 기능을 대신하면서 보신각 개축 이야기는 쑥 들어갔고 종소리마저 자취를 감췄다. 종의 침묵이 깨진 것은 삼일운동이었다. 청년 정태신은 보신각으로 들어가 종을 난타하며 만세시위를 북돋웠다. 이 일로 정태신은 옥고를 치렀고 종은 대중을 선동하는 위험한 물건으로 낙인 찍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타종을 허가하지 않은 데는 이런 연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보신각종을 '벙어리 종'이라고 불렀고 울 수 없는 종의 모습에서 식민통치 아래 억압받는 자신을 봤다.
심훈이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처럼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겠다던 그날이 오자 '벙어리 종'도 소리를 되찾았다. 광복 이듬해에 열린 삼일절 기념식은 그 시작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미군정청 관료 등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이승만, 김구 등 정당 대표 8명이 함께 종을 쳤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한 수십 년간의 통한과 의분을 한데 뭉쳤다가 한꺼번에 터뜨려 보신각 큰 종(巨鐘)의 우렁찬 소리가 북악에 울리고 남산에 부딪혀 다시금 장안 전역에 퍼져 그 소리가 조선의 심금을 스칠 때 조선의 가슴들은 과연 어떠했는가"라는 신문기사의 일성은 그날의 감격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이후로 삼일절과 광복절, 그리고 제야는 종을 울리는 날이 됐다.
한편에서는 제야에 종을 치는 것이 일본 사찰의 풍속에서 비롯됐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집마다 있는 현관(玄關·출입구 안쪽에 신발을 벗어놓는 장소를 따로 두는 것은 일본 건축에서 온 것이다)처럼 보신각 타종 행사는 이미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됐다. 그 모습 또한 사뭇 다르니 여러 사람이 모여 새해의 기쁨을 나누는 보신각은 우리의 타임스스퀘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텔레비전의 보급과 생방송 송출은 제야의 타종을 온 가족이 즐기는 전국 단위의 언택트 축제로 만들어줬다. '9시 뉴스'가 나오기 전 "이제는 잘 시간"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어린이들조차 이날 자정만큼은 해를 넘기기 전에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수세(守歲) 이야기를 핑계 삼아 종 치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보신각도 이전과 보수, 신축을 거듭해 현재의 종각은 1979년 다시 지은 것이며 지금의 종은 1985년 새로 만든 것이다. 시대의 부침 속에 일제강점기의 수난도, 광복의 환희도 함께한 옛 보신각종은 이제 그 소명을 다하고 박물관 야외정원에서 새로운 역할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다. 종을 바라보며 2023년을 돌아보고 2024년을 맞이한다.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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