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어둠에서 배워야 할 것들
권력 독점한 건 볼셰비키 급진파
히틀러는 처칠에 '악독한 인간'評
부조리 겪는 건, 악인보다 우리가
부지런하지 못하고 덜 집요한 탓
새해 '역사의 분기점'서 행동해야
이응준 시인·소설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는 일이 되어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환하게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가 게오르크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첫 문장이다. 낙담에 빠진 후배가 나를 찾아와 조언을 구할 때 저 문장이 떠올랐다. 물론 저 아름답지만 공허한 수사학(rhetoric)이 정답일 리 없고, 무엇보다 나는 내게서 정답을 구하는 그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평소 20세기 공산혁명가들을 탐구하곤 한다. ‘투쟁’의 관점에서 경이로운 점이 많고, 역사의 생리(生理)와 인간 본성에 대해 각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유독 다음 두 가지 경우가 자꾸 생각난다.
그 첫 번째 사례로, 1917년 3월 3일 아침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됐음에도 불구하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등의 사회주의자들은 시위대가 쥐여준 권력 사용에 소극적이었다. 마르크스의 이론(교리?)에 따르면 이 ‘2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시민 혁명)이어서 러시아가 자본주의 사회가 된 다음에야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접어드는 게 수순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레닌은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 중이었다. 그는 러시아에서의 혁명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 생전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동지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로마노프왕조가 붕괴된 것이다.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4월 3일 저녁 귀국한다. 그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마르크스 이론에 일종의 ‘뒤틀림(distortion)’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지금의 이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분명하니 밀어붙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치 사교교주가 성경을 왜곡하듯 대중을 후려서 지지부진을 분쇄하고 정국을 장악한 것이다. 2월 혁명은 시민과 온건파의 것이었는데 10월에 권력을 독점한 것은 결국 볼셰비키 급진파였다.
그 두 번째 사례, 7월 4일부터 신문들을 중심으로 레닌이 독일의 스파이라는 얘기가 퍼진다. 볼셰비키들이 체포되고 20만루블의 현상금이 붙은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한다. 레닌은 이 기간마저 좌절하지 않고 <국가와 혁명>을 저술한다. 그때 러시아에서 코르닐로프라는 장군이 우파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볼셰비키와 대중에 의해 48시간 만에 수포로 돌아가고, 그 덕에 레닌은 복귀해 ‘러시아 10월 대혁명’을 완성한다. 수상 케렌스키는 미국으로 도망친 뒤 이렇게 회고한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가 없었다면 볼셰비키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장면들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운명에 미온적이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선함과 악함과는 관계없이, 역사는 레닌처럼 행동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또한 난세에는 적의 절명적(絶命的) 위기에 그 적을 부활시키는 바보가 등장하니 그런 자와 그런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그 바보가 한순간에 역사의 물길을 지옥 쪽으로 바꿔버리는 까닭이다.
히틀러가 처칠에 대해 ‘이렇게 악독한 인간은 처음 봤다’고 평해놓은 걸 읽고는 웃다가 이내 깨달음에 서늘해진 기억이 생생하다. 자유를 지키려는 자는 그 자유를 뺏으려는 자보다 강해야 하는 법이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참담한 부조리들은 우리가 그것을 저지르는 악인들보다 부지런하지 못하고 집요하지 못해서다. 이 이치를 깨끗하게 받아들여 전부를 걸고 싸우지 않으면, 정치적 현실은 노예가 돼버린 사실 자체를 자각 못하는 대중을 양산한다.
밤하늘의 별들이 ‘인간의 길’을 밝혀주는 그런 시대는 없다. 빛은 눈을 멀게 한다. 빛이 아니라 어둠에서 배워야 한다. 어둠 속에 있는 모두가 각자 등불을 들고 길을 찾아가면 그것이 ‘시대의 별자리’가 된다. 이것이 낙담 속에서 해답을 구하는 그에게 전하는 진실이다. 새해, ‘역사의 분기점’에 우리는 서게 될 것이다. 산업화를 이루고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했듯이 ‘386 운동권 정치’를 청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실수를 차단하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 유일하게 남은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행운인지 모른다.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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