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세상은 참 좋아졌다, 당신만 모르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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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 헌문(憲問) 편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미생무(微生畝)가 공자(孔子)를 일러 말했다. “구(丘·공자의 이름, 예전 성균관 한림원 선생님들은 ‘某’라고 읽었음)는 어째서 이다지도 연연해 하는가? 말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微生畝謂孔子曰: 丘, 何爲是栖栖者與? 無乃爲녕(人변, 二밑에女)乎?
미생무위공자왈: 구, 하위시서서자여? 무내위녕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 감히 말재주를 부리려는 것이 아니라, 고집불통을 미워하는 것이다.”
孔子曰: 非敢爲녕也, 疾固也.
공자왈: 비감위녕야, 질고야.
미생무란 사람에 대해 주자(朱子) 주(註)에선 ‘미생이 성이고 무가 이름이다. 미생무가 (감히) 공자의 함자를 부르면서 말이 매우 거만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나이와 덕(悳)이 있으면서 은둔한 자인 듯하다’라고 했습니다. 연연하다(서서·栖栖)는 말은 일반적으로 정처없이 사방에 떠돌아다님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공자의 대답에서 고(固)라는 말은 주자 주에선 집일이불통(執一而不通), 즉 한 가지에 집착헤 두루 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어떤 책에선 ‘편벽되다’로 해석하고 있는데 큰 차이는 없습니다.
대학 시절, 저는 논어를 읽던 중 이 구절과 마주치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자가 고집불통을 미워한다고? 공자라는 인물이야말로 마치 모든 완고한 보수성과 수구주의의 원조라 여기는 통념에서 저 역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탓이죠. 당시엔 공자마저도 미워할 더 극악한 보수주의자가 있었던가? 한참을 생각해 본 후, 전 그날의 일기에 이 충격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공자에게도, 우리에게는 마치 구질서의 원초적 정점처럼 여겨지는 그에게도, 부단히 변화하고 새로워지려는 사람들을 방해하는 거대한 습관의 틀을 항상 미워하면서 살았던 가슴속의 새가 있었던 것일까.
과연 공자가 미워한 고(固)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미생무란 사람은 논어에 등장하는 몇몇 사람들, 이를테면 원양이나 접여, 장저와 걸익과 같은 도가(道家) 계열의 은자(隱者)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논어 곳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공자를 측은히 여기면서 매우 오만한 태도와 어조로 ‘헛된 짓좀 그만 하시지’라며 점잖게 타이르는 배역을 맡고 있습니다. 무엇을 타일렀던 것일까요?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려 했습니다. 온갖 전란과 난신적자, 하극상으로 점철된 춘추 말기의 혼란상은 통치자의 도덕성 회복 없이는 극복될 수 없는 처절한 현실이었습니다. 인정(仁政)을 바탕으로 한 이상국가! 정명(正名)의 원칙 아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직책과 직분에 성실함으로써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어찌보면 나이브하면서도 래디컬한 국가를 실제로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했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제후들을 설득시켜 그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같은 이상이 자신 혼자서 일시 일대(一代)에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학단(學團)을 조직했고, 전통문화와 제도의 정수(精髓)들을 그 제자에게 전수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또한 적극적으로 노(魯), 제(齊), 위(衛), 진(晉) 등 각국의 정계에 등용시키고자 했지요. 나를 쓰든지, 아니면 내 제자들을 쓰시오! 이때를 전후해서 학식과 교양을 갖춘 사인(士人)이라는 최초의 지식인 계층이 동양사에서 등장하게 되는데, 그들의 의식과 행동, 그리고 정체성 확립에 공자의 학단은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 사인들은 서주(西周)시대 이래의 종법적(宗法的) 혈연관계에서 떨어져나온 귀족의 방계 후예들과, 몰락한 주(周) 왕실에서 흩어진 하급관리 출신이 많았습니다. 실존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노자(老子)도 주 왕실의 도서관 사서 출신이었다고 알려져 있죠(이게 사실이라면 베이징대학의 사서였던 마오쩌둥과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당시와 같은 난세에서 어떻게 처신했을까요? 바로 은거였습니다. 그래서 접여는 미친 척 하며 세상을 돌아다녔고, 장저와 걸익은 벽지에 숨어 농사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나가는 길목에 미리 숨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참 이상하게도 논어의 이런 부분들은 무척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들이 당시 지식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무력감과 허무에 빠져 있었던 것이죠. 그들에게 공자의 모습이 과연 어떻게 비쳐졌겠습니까. 세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제후들 앞에서 말재주를 부려 구차하게 입신을 바라는 자로 보였던 것이죠. 논어 미자(微子) 편에서 걸익은 이렇게 말합니다. 도도한 것이 천하가 다 이러한데, 누구와 더불어 바꾸겠는가(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도도한 것이라…. 우리는 어느덧 고(固)의 정체에 가까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공자와 당시 지식인들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자의 면전에서 예(禮)를 무시하는 방법으로 그를 대놓고 희롱하는 자까지 있었습니다. 공자조차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러 그의 정강이를 공격하는, 의외로 다이내믹한 장면이 논어 헌문편에 나옵니다.
이들이 바로 공자가 말한 고집불통의 실체였을까요? 이 고(固) 라는 말에 대해서는 주주(朱註)조차 아무런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마치 이런 당연한 걸 뭘 물어보나? 자네가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이 말이죠. 포함의 고주(古註)엔 ‘세상이 고루한 것을 싫어해 도로써 그것을 교화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고집불통이란 자신의 도가 쓰이지 않는, 패도(覇道)가 횡행하는 당시의 정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마치 각개전투 훈련장 앞의 예비군처럼 ‘인정(仁政)? 그런 걸 내가 왜 하나?’라며 혀를 차는 은거한 도가사인들. 그리고 세력확장, 정쟁과 사리사욕에만 눈이 멀어 민(民)을 돌아보지 않는 제후들. 공자에게 있어 둘중의 누가 고(固) 였을까요? 전 양쪽 모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런 중의적 표현이라야 공자의 미생무에 대한 반격의 의미가 포함되기 때문이죠.
-지식인은 당연히, 혼탁한 세상에선 그저 속세를 떠나 은거해야 한다.
-정치인은 당연히, 자신과 가문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를 게 없겠지만, 이같은 행동양식은 당시에 있어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상식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건 걸익이 말했던 도도(滔滔)와 통하는 것, 즉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거대한 신념체계로 작용하고 있던 흐름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을 모아 실제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살아있는 학문(詩·書·禮·樂·謝·數라는 공자의 커리큘럼은 당시로선 총체적 지식 그 자체였습니다)을 전수시켜 정계로 등용시키려는 공자의 노력은 당시의 분위기로선 분명히 튀는 행동이었습니다. 그의 사상이 지나가버린 하(夏)·상(商)·주(周) 삼대(三代)의 질서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였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분명히 당대의 ‘습관’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습관에 구속돼선 안 된다. 가끔 습관은 진리를 짓밟기도 한다. 습관보다는 진리가 우리의 행동을 인도해야만 한다.”
정신적 습관. 그것은 교조(敎條)의 또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마오쩌둥은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종교적 교의(교조)로 여기는 사람들은 맹목적인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당신들의 교의는 분(糞)만도 못하다고 말해야 한다.” 표현의 비속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서 마오는 분명 맞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오 자신조차도 이 금언의 중량감에 끝내 짓눌리고 말았던 것일까요. 1966년 문혁기(文革期), 손에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천안문 앞에서 마오 찬가 ‘동방홍’을 부르던 무수한 홍위병들 앞에서 모자를 벗어 천천히 흔들며 답례하던 마오가 이미 새로운 교조 그 자체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었을까요.
어째서 이런 일이? 여기서 우리는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분석했던 마르틴 루터의 심리적 특성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권위를 혐오하고 그것을 뒤집고자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성격 자체가 원래 권위적이었을 수가 있으며, 권위를 뒤집고 나서는 자신이 다시 권위주의의 화신으로서 군림하게 되기 쉽다는 것이죠. 교조에 대한 저항이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교조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 고(固)를 미워해서 그것을 내쫓은 ‘고(固)를 미워했던 주체’는 다시금 새로운 고(固)가 된다는 것이죠. 마땅히 경계하고 주목할 일이 아니던가요.
지난 20세기, 그리고 새천년이 밝은 뒤 다시 한 세대 가까이 지난 세월 우리에게 여러 고(固) 들이 횡행하던 시대였습니다. 민족주의든, 공산주의든, 한국적 민주주의든, 주체적 사회주의든, 민족적 자본주의든, 신식국독자(?)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든, 한번 머리에 박힌 ‘당연한 생각’은 그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았지요. 그러나 불과 10~20년전의 ‘상식’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세상 참 좋아졌다’고 빈정대는 사람에게는 “세상은 정말 좋아졌다. 당신만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대답이 적절해졌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사람에게는 “이젠 주먹보다 CCTV가 더 가깝다”는 대답이 들어맞게 됐으며, ‘요즘 젊은 여성 사원들~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난다’는 말을 하는 직장 상사에게는 “여태껏 큰일날 일을 저지르고 살았는데도 무사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대가 됐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번번이 얼마나 비싼 수업료를 내고 시행착오를 겪고 또 겪으며 살았던 걸까요. 그 모든 수업료가 결국 고(固)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끔 세팅시켜 주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리의 하부구조는 늘 존재할 것이고, 의식의 전환을 통해 받아들인 새로운 패러다임 또한 언제까지나 변치 않는 고(固)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고(固)에 대한 집착을 거부하는 이야기로 올해 ‘돌발史전’의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때로 우리 앞에 새로운 깨달음이 나타나거나 오래 전의 깨달음이 새삼스럽게 내 의식 속에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개인이 그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그 부분들이 모여 온전한 전신상(全身像)을 만들기 전까지 모든 총체적 평가는 유보돼야 하며, 의심받아야 합니다. 보편적 진리란 없습니다. 다만 인생 행로(行路)길 작고 큰 도움의 손길을 말없이 내밀 수 있는 벗으로서의 지혜가 있을 뿐입니다. 지친 일상의 도피처가 아니라 커다란 방향의 실마리를 제시해줄 수 있는. 지난 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 대단히 진부한 문장을 하나 덧붙이자면, 새해에는 더 나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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