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한의말글못자리] ‘느낌’이라는 땅

2023. 12. 2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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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라는 땅이 있다고 하자.

생각 쪽이 번성하는 데 비해 느낌 쪽은 황폐하다.

생각이 이성과 밀접하다면 느낌은 감성과 밀접하다.

사실 이들은 함께 협동하여 일하지만, 대부분 느낌은 제쳐놓고 생각만 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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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라는 땅이 있다고 하자. 그곳은 ‘생각’이라는 땅 옆에 있다. 사람 속에는 다른 이름의 땅이 여럿 있는데, 여기서는 그들만 가지고 얘기하기로 한다. 일상생활에서 보면 두 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생각 쪽이 번성하는 데 비해 느낌 쪽은 황폐하다. 둘은 서로 붙어 있고 길도 연결돼 있으나, 느낌은 거의 존재조차 잊힌 듯하다.

생각이 이성과 밀접하다면 느낌은 감성과 밀접하다. 사실 이들은 함께 협동하여 일하지만, 대부분 느낌은 제쳐놓고 생각만 중시한다. 사고력, 판단력 같은 내적 능력(힘)이 생각 땅에서만 사는 양 여기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느낌하고 관계가 깊은 ‘감수성’, ‘정서’, ‘마음’ 따위는 능력과 상관없다고 간주하여 ‘~력’이 붙은 단어조차 없다. 이렇다 보니 느낌 곧 감성 역시 기르지 않으면 사람이 목석(木石) 같아진다는 인식이 부족하여, 그 교육에도 등한하다.

이는 한국만의 실정이 아니었던 성싶다. 미국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이 ‘감성지능’을 저술하여 지능지수(IQ)와 구별되는 감성지수(EQ)를 대중화시킨 게 1995년이다. 오랜 동안 사람들은 생각은 차고 느낌은 뜨거우므로 생각으로 느낌을 식혀야 한다고 보았다. 생각은 변하지 않으나 느낌은 변덕스러워 생각이 더 가치 있다고 믿기도 했다.

감성지능 개념은 한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현실의 변화는 요원하다. 한국인의 내면에서 느낌은 여전히 ‘지능’ 대접을 받지 못한 채 날로 메말라가고 있다. 가령 대가 없는 교제는 낭비이며, 내 기분을 ‘어지럽히는’ 타인은 지옥이다. 의대가 최고라는 ‘생각’만을 고집하며 대입 당사자의 ‘의사 직업이 싫은 마음’은 철없는 감정으로 매도한다. 이러다가 사람보다 생각을 잘하리라는 인공지능에 뒤떨어질지 모른다. 그것이 제 나름의 느낌을 경험하기는 곤란하기에, 경쟁에서 이기려면 느낌의 땅을 개발해야 할 텐데 말이다.

느껴야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하면 깊이 느끼지 못한다. 또 타인에 공감할 줄 모르면 학력이 좋아도 원만한 인성을 지니기 어렵다. 느낌과 생각은 종속이 아니라 동반 관계인데, 평등에 둔감한 인습이 심성의 나라까지 지배하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최시한 작가·숙명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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