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입으로 지은 업 깨끗하게 씻으며
한 사람을 만나는 건 하나의 문을 여는 것. 말 하나를 배우는 것도 문 하나를 열고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가전제품 살 때, 어디 기계만 달랑 오던가. 설명서에 딸려온 새로운 단어로 사용법을 익힌다. 좋은 일은 앞에 있는 법, 이 물건과 엮어나갈 사연은 또 얼마이겠는가.
사람 人. 작대기로 지게를 받쳐놓은 듯 사람이 서로 의지하는 모양이라고 풀이한다. 문 門. 문이야말로 더욱 구체적이다. 마주 보는 두 얼굴의 옆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문을 만나고 문을 통과하면서 결국 바깥까지 나아간다.
대설 지나 동지도 지나면서 시간의 문이 점점 잘록해진다. 계묘년을 닫으며 성큼 들어서는 갑진년. 올해의 마무리를 겸해서 경주에 간다. 발뒤꿈치라도 뚫을 기세의 찬 날씨. 신경주역 광장의 무덤에 가볍게 목례하고 대릉원의 고분군을 거닌다. 여기에서는 오로지 행각(行脚)이다. 첨성대 지나 계림, 반월성에 올라 경주를 일별한 뒤, 내처 성곽을 따라 박물관까지 살살 걸었다. 지금 우러르는 하늘은 천년 전이나 천년 후에도 서로 닮은 풍경.
‘수구다라니, 아주 오래된 비밀의 부적’전. 경주 남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수구다라니(隨求陀羅尼). 이 부적은 부처의 핵심 가르침으로 신비로운 힘을 지니는 주문을 말한다. ‘입으로 지은 업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참된 말’이라는 뜻의 수구다라니. 소박하고 그윽하고 도저한 전시장에서 신라에 흠뻑 젖었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시간.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로 입안을 청소하며 바깥으로 나선다. 들고 남을 구별하지 않는 정문 중앙에 건장한 수위(守衛)가 서 있다. 좀전 나를 맞이하던 그 자세 그대로의 안내판. 이목구비를 지운 채 단석산의 저녁놀을 배경으로 ‘무료관람’, 네 글자를 받드는 저 훤칠함 앞에서 어찌 신라인의 현신인 듯 돌올한 기상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더냐.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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