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목은 이색이 사시사철 즐긴 ‘팥죽’
어느 새 2023년 동지도 지나갔다. 올해 동지는 마침 애동지(음력 동짓달 초순에 드는 동지)였는지라 팥죽을 쑤네 마네 하는 말도 돌았다. 애동지에는 팥죽을 안 먹는다? 괘념치 마시라. 애동지에 팥죽 안 먹는 사람도 있나 보다 하면 그만이다. 애동지는 팥죽 대신 팥떡 먹는 날이 아니라, ‘팥떡까지’ 먹는 날이다. 팥죽은 워낙에 사계절 별식이다. 동지뿐 아니라 대보름에도 팥죽은 소담한 계절 음식이었다.
서울·경기 지역 세시풍속을 기록한 홍석모(1781~1857)는 <도하세속기속시>에서 “쌀과 팥즙을 솥에 쑤어(米香豆汁煮鍋鐺)/ 복날이면 붉은 팥죽 맛을 보네(庚日輒看赤粥嘗)”라고 읊었거니와 문헌 곳곳에 땀 뻘뻘 흘리며 한여름에 기어코 뜨거운 팥죽을 먹어치우는 모습이 남아 있다. 팥죽은 해장에도 좋았다. 문체 좋기로 유명한 조선 문인 장유(1587~1638)는 고기에 해산물에 기름진 음식을 곁들여 과음하곤 새벽부터 팥죽을 찾았다. 그가 속을 풀자고 들이켠 팥죽은, 팥을 푹푹 삶아 밭쳤으되 쌀 알갱이는 온전히 살아 있었다. 부드럽긴 유지방 같았다. 거기다 꿀까지 타 마신 덕에 그는 숙취를 물리칠 수 있었다. “서리 내린 아침 석청(바위틈에서 딴 꿀) 탄 팥죽 한 사발(霜朝一盌調崖蜜)/ 따듯하니 속 풀어지고 몸은 절로 편안해(煖胃和中體自安).”
고려 문인 이색(1328~1396)도 한여름, 동지 할 것 없이 팥죽을 즐겼다. 위에 보인 장유의 시는 이색의 심상과 표현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색은 구름마저 뜨거운 찌는 날, 땀은 줄줄 흐르고 눈앞은 캄캄한 가운데 팥죽을 찾았다. 물론 팥죽이 소나무 그늘 아래 물가에 지은 집만은 못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숨통을 틔울 만했다. “푸른 사발에 팥죽 받아 석청 타 마시고는(豆湯翠鉢調崖蜜)/ 얼음 같은 한기가 살갗 파고듦을 느끼네(便覺氷寒欲透肌).” 이 팥죽은 아마도 차게 식혀 단맛을 더한 놈이었을 테다. 동짓날엔 이런 팥죽을 대했다. “유지방 같은 팥죽이 비취빛 사발에 한가득(豆粥如酥翠鉢深).”
이색은 시 속 팥죽의 물성을 유지방(酥) 또는 양젖 요구르트(羊酪)에 견주었으니 또한 흥미로운 노릇이다. 아무려나 팥죽은 사계절 두루 먹기 좋은 음식이고, 한겨울에 더욱 생각나는 음식임에 틀림이 없다. 집집이 쑤는 방식도 다 달랐다. 팥만으로도 쑤고, 팥을 퍼지도록 삶은 뒤 쌀이나 쌀가루를 더해 쑤기도 한다. 쌀밥을 더해 쑤는 수도 있다. 옥수수 나는 데서는 옥수수 알갱이를 풀거나 살려 쑤기도 한다. 좁쌀이 어울리는 경우도 있다. 새알심 또한 찹쌀가루로 끝이 아니다. 감자 나는 데서는 감자녹말을 쓰기도 한다. 말하자면 감자옹심이 띄운 팥죽이다.
팥죽은 고려시대 이미 별미로 자리잡은 음식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원과 일상의 조건과 맥락이 달라졌으니 어떤 민속은 이어지고, 어떤 민속은 사라진다. 아쉽지만 하릴없는 노릇도 있는 법. 다만 동지에 팥죽 한 그릇 못 먹는 이웃이 보이면 그 집에 ‘모른 체하고’ 팥죽 한 그릇 가져다주는 걸 ‘도리’로 여겼다는 옛 어른 말씀은 붙들고 싶다. 팥죽과 같은 계절 음식을 할 때엔, 이를 못 누리는 사람은 없는지까지 살폈다. ‘모른 체하고’-정말 배려, 친절을 담겠다면, 정말 사람다운 도리를 담는다면, 모른 체할 줄도 알아야 할 테다. ‘모른 체하고’ - 이 말에 담긴 마음을 생각한다. 생각이나마 해본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 죽고 싶을 만큼 미안하고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