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천전리로 돌아가자

기자 2023. 12. 28.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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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운구의 ‘암각화 또는 사진’ 전시(한미사진미술관·2024년 3월17일까지)는 석기시대 사람들이 무지몽매하다는 기계시대 인간들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고 있다. 바위그림이 보여주는 인간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칼로 캔버스의 원형인 ‘파티나’(넓고 평평한 검은 바위)에 갈거나 찍어내거나 쪼거나 파내거나 새겨냈다. 각획(刻劃)의 탄생을 넘어 이미 이때 현대미술의 모든 기법이 지구상에서 실행되었다. 한국의 반구대와 천전리를 시작으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와 러시아, 몽골, 중국의 암각화 사이트에 펼쳐져 있는데, 큐비즘이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를 방불케 하는 선사인들의 ‘바위그림 또는 사진’이다. 배가 고프면 창이나 활로 바다와 산에서 고래나 사슴 떼를 사냥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각인(刻印)해냈다. 여기서는 피카소와 달리는 물론 추사까지 다 만난다.

또 다른 사이트에서는 서로 다른 종족끼리는 죽어라 전쟁을 하면서도 흥청망청 가무(歌舞)를 즐긴다. 인간이 유희의 동물임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지금 우크라이나·러시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중에도 벌어지는 크리스마스 축제를 보는 듯하다. 우리는 늘 전쟁 없는 평화를 기도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은 정반대다. 노골적인 성기 노출에다 남녀 간 사랑을 나누면서도 종족을 보전하고야 마는 인간을 묘사한 무수한 암각화 앞에서는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도 이들의 아들의 아들 아들 아들…인데, 지금 우리는 저출생으로 인해 얼마 안 가서 나라가 사라질 판이라니. 인구절벽 위기 앞의 기계시대 인간들이 석기시대 사람들보다 더 무지몽매하다. 인간이 진화시킨 문명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질주하고 있다는 경고가 강운구의 ‘암각화 또는 사진’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사이트는 한국의 천전리 추상문양(사진)이다. 이유는 반구대를 위시한 세계의 암각화가 인간의 의식주나 생사 문제를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찍어내고 있다면, 천전리는 반복의 반복을 거듭한 곡직(曲直)의 무수한 추상문양으로 미의 질서를 각획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하추상문양은 한국만 해도 즐문토기, 고령 장기리 암각화, 다뉴세문경, 가야토기의 원(○) 네모꼴(□) 삼각형(△)의 투각문양까지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훈민정음의 천(天) 지(地) 인(人), 즉 ㆍ ㅡ ㅣ까지 관통하고 있다. 여기서는 선사와 역사의 구분도 무색해진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석기시대에 이미 구상과 추상 언어를 기계시대 못지않게 능수능란하게 구사했음은 물론 삶과 죽음 문제를 내면 표출과 대상 재현의 그림언어로 동시에 드러냈음을 방증한다. 강운구는 반구대의 고래가 서 있는가 누워 있는가 하는 ‘암각화 또는 사진’의 상징해석으로 50년 만에 이 문제를 풀어내고 있다면, 사지를 쫙 벌리고 엑스터시 상태로 춤추는 샤먼이나 천전리 추상언어 또한 생사 너머의 영원을 노래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추상이라 하면 20세기 초반 서구의 칸딘스키, 몬드리안, 말레비치를 앞세웠다. 하지만 천전리와 파리, 뉴욕이 시공을 접고 무의식의 추상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르다면 연극의 무대 막과 같이 선사와 역사의 정치라는 실존인데, 무문자시대 유토피아 노래가 디스토피아로 내달리는 기계시대 지금일수록 더 크게 들린다. 우리가 야생의 시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암각화 또는 사진’에 다 찍혀 있다. ‘반자도지동(返者道之動)’의 길은 정치 이전에 예술이 열어가야 할 일이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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