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터카 배터리 완전 방전 사건 [삶과 문화]

2023. 12. 2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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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결혼기념일이 들어 있는 5월이면 제주나 가까운 해외로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코로나19 시국 이후에는 한 번도 그러질 못했다.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처럼 크리스마스가 들어 있는 주에 스케줄을 조정한 뒤 제주에 사는 지인 커플과 5일만 집을 바꿔 생활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한 시간 만에 도착한 렌터카 회사 직원은 내가 실내등이나 후미등 같은 걸 밤새 켜놓고 자서 방전된 것 같다고 진단하고는 배터리를 충전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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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준 작가 제공

해마다 결혼기념일이 들어 있는 5월이면 제주나 가까운 해외로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코로나19 시국 이후에는 한 번도 그러질 못했다. 책 쓰기 워크숍이나 강연 등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점도 있었지만 사실은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연말에 기특한 아이디어를 냈다.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처럼 크리스마스가 들어 있는 주에 스케줄을 조정한 뒤 제주에 사는 지인 커플과 5일만 집을 바꿔 생활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내가 묻자 제주에 사는 그분들도 좋아라 화답을 해서 당장 '하우스 스와핑'이 이루어졌다. 그들도 우리처럼 두 명만 사는 단출한 가족이었고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나는 떠나기 전날 우리가 자주 다니는 동네 카페와 밥집, 술집, 빵집들의 정보를 빼곡하게 적고 간단한 약도까지 그려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몇 해 동안 살인적으로 오른 제주도의 숙박비를 해결하게 된 걸 생각하면 그 정도 서비스는 일도 아니었다.

편성준 작가 제공

어떤 여행지에서든 항상 걸어 다니기만 하던 우리 커플이 이번엔 렌터카도 빌렸다. 제주에 있는 서점과 미술관 등을 돌아다니려면 아무래도 차가 있어야겠다는 아내의 판단 덕분이었다. 하지만 첫날 우리가 간 곳은 미술관이 아니라 삼치회로 이름 높은 식당이었다. 거기서 삼치회에 한라산 소주를 호쾌하게 마시는 아내를 바라보며 나는 물로 건배를 했다. 제주 여행 첫날부터 대리운전을 부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숙소로 들어오자마자 공항에서 산 싸구려 국산 위스키를 마시며 "여행이란 이런 맛에 하는 것!"이라 외쳤다. 문제는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침을 먹으러 나가려고 차문을 열었더니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내가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하얗게 질렸다. 방전이었다.

편성준 작가 제공

렌터카 회사에 전화를 해서 서비스 기사를 호출했다. 한 시간 만에 도착한 렌터카 회사 직원은 내가 실내등이나 후미등 같은 걸 밤새 켜놓고 자서 방전된 것 같다고 진단하고는 배터리를 충전시켜 주었다. 차가 다시 움직여서 우리는 아침을 먹고 몇 년 만에 다시 가보는 책방 소리소문에도 갔다. 이 책방은 얼마 전 벨기에의 한 출판사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의 서점 150'에 선정된 곳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서점 대표님과 인사를 나누고 서점에 있는 내 책에 사인도 했다. '서점에 가면 반드시 책을 사자' 주의인 우리는 새 책을 네 권이나 사서 주차장으로 갔다. 또 차가 안 움직였다. 기가 막혔다. 또 서비스 기사를 불렀고 결과적으로 차는 세 번이나 방전되어 결국 렌터카 회사에서 배터리를 교체해 주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움직이는 자동차를 운전하며 생각했다. 너무 일에만 몰두해 번아웃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흔히 방전이라는 단어를 쓴다. 렌터카는 방전되면 서비스 기사를 부르면 된다. 물론 약간의 당황과 짜증을 동반하지만 큰일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방전된 것 자체를 모를 때가 많다. 그리고 고갈된 에너지를 다시 채우기도 힘들다. 연말이다. 일 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천천히 헤아려 보고 완전 방전되기 전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충전을 꼭 하자. 여행이 아니더라도 좋다. 사람은 좋은 영화나 연극 한 편, 오랜 친구와의 저녁식사만으로도 기운을 얻는다. 제발 일만 하며 살진 말자. 우리는 이미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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