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예술은 아픔을 껴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2023. 12. 2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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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문화예술 행사 참여율 72.9%
英·아일랜드서 장애음악 앙상블 설립돼
미국, 수화·자막 등 세심한 기획 돋보여
바흐 선율 제스처로 표현해 독일서 공연
BSO리사운드
케네디 센터의 접근성 안내
싱앤사인 요한 수난곡
케네디 센터의 접근성 안내

월간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클래식 음악의 배리어 프리

전시회나 공연장에서 장애인을 만나는 일은 드물게 느껴진다. 그들을 위한 예술 프로그램이 부족하거나, 이곳까지 발걸음하기에 제약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2017년도 아일랜드에서 발간된 한 보고서는 그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우선 장애인의 문화예술 행사 참여율(79%)이 모든 성인 평균치(64%)보다 높았다. 아일랜드뿐만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그 수치가 2005년부터 꾸준히 성장해, 2015년에는 모든 성인 평균 대비 약 5% 낮은 72.9%를 기록했다. 이 차이는 장르에 따른 남녀 성비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정도다.

그렇다면 왜 현장에서는 이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던 걸까. 아일랜드의 보고서는 되묻는다. 우리가 아주 좁은 시각으로 장애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냐고. 많은 경우, 장애는 한눈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세계 인구 6명 중 1명이 장애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이들은 늘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이 통계는 잘 보이지 않았던 또 하나를 드러낸다. 바로 장애인의 높은 문화예술 참여도 뒤에는 많은 이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무적인 영국·아일랜드, 미국, 독일의 사례를 꼽아봤다.

◇영국·아일랜드: 역사를 바탕으로

영국은 1960년대, 장애 운동이 처음 일기 시작한 나라다. 이러한 역사로, 오늘날 영국에서는 문화예술 활동의 장벽을 낮추기 위한 국가기관, 비정부기구, 협회 등의 활발한 활동이 눈에 띈다. 특히 문화산업계 종사자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방점을 찍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더욱 폭넓은 관객을 유입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음악계 종사자들이 모인 UK Music은 더욱 접근성 높은 공연을 고민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다양한 배경의 전문가를 고용하기 위한 가이드라인 등을 제시하며 그 기반을 다지고 있다.

2018년에는 세계 전문 악단으로는 최초로 본머스 심포니(BSO)가 장애인으로 구성된 산하 앙상블 'BSO리사운드'를 런칭했다. 창단 첫해 BBC 프롬스에 오르며, 축제에 참여한 최초의 장애음악인 앙상블로 기록됐다. 이런 BSO리사운드를 보며 누군가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덜게 될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음악가의 꿈을 키울 수도 있다. 앙상블이 갖는 '임팩트'는 여러모로 엄청나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는 BSO리사운드에 임팩트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다른 예로, 영국 브리스톨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파라오케스트라(Paraorchestra)는 장애인, 비장애인이 한데 모인 전문 악단이다. '21세기 오케스트라'를 표방하며 실험적인 공연을 이어가고 있어요. 필립 글래스의 히어로즈 심포니와도 협업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이들이 전문 음악가로 활동하기 위해선 질 좋은 교육과 경험도 필요하다. 아일랜드에서는 내셔널 크리에이티브 펀드와 로열 아일랜드 음악원이 주관해 국립 장애 청소년 오케스트라 '르 케일러'를 설립했다. 다운 증후군이나 자폐증을 앓는 연주자도 있어서, 단체는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지휘법에서 발전한 특별한 소통법(Conductology)을 채택했다. 이곳의 모든 음악가가 이해하는 18개의 제스처가 이 소통법의 구성요소다.

◇미국: 휠체어 출입구를 넘어선 고민

미국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놀라울 정도로 다채롭고, 많은 공연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여러 장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심하게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도 볼 수 있다.

우선 케네디센터로 가볼까. 요즘 많은 공연장 홈페이지에 '접근성(Accessibility)' 페이지가 마련돼 있다. 주로 휠체어 동반 관객에게 필요한 정보가 제공된다. 케네디센터의 경우 훨씬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장애인을 위한 여러 예정 공연 목록도 그중 하나다. 이는 다시 한번 '자막이 있는' '감각친화적인' '수화가 함께하는' 등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각 카테고리에서는 한 달에 1~2회의 공연이 개최된다.

그중 '감각친화적 공연(Sensory-Friendly)'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자폐, 신경 발달 장애를 갖고 있는 관객을 위해 환경이 조성되는 공연이다. 케네디센터는 조명을 기존 30~50% 밝기로 낮추고, 자극적인 부분을 조정한 음악을 연주한다. 또, 과도한 자극을 받아 휴식이 필요한 관객을 위한 공간이 로비에 마련돼 있다.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한 미국 단체들의 고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감각친화적 공연'은 케네디센터와 링컨 센터 등의 공연장뿐 아니라, 뉴욕필·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미네소타 오케스트라 등의 악단의 상설 프로그램이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폐증 발병률이 보고된 지역인 뉴저지주의 뉴저지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주민을 포용하는 과정을 통해, '감각친화적 공연'을 가장 활발히 펼치는 악단으로 거듭났다.

뉴저지 주민을 찾아가는 실내악 공연이 핵심 프로그램인데, 다양한 악기 만나기, 인기 동화 음악으로 즐기기, 다른 문화권 음악 감상하기 등 다양한 콘셉트에 맞춰 여러 연주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독일: 새로운 언어의 바흐 합창곡

바흐가 30여 년간의 생을 보낸 라이프치히에서는 세기에 걸쳐 수만 번의 '요한 수난곡'이 불리었을 것이다. 지난해에는 특별한 모습의 요한 수난곡이 라이프치히 성 베드로 성당에 울려 퍼졌다. 바로 수화로 노래되는 최초의 '요한 수난곡'이었다. 합창단은 손바닥을 펴고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리며 '찬양'이라는 단어를 부르고,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사람과, 그 선율을 제스처로 표현하는 사람이 반주를 맡았다.

이 프로젝트는 소프라노 수잔네 하웁트의 질문에서 시작됐다. "난청이나 청각 장애를 지닌 사람이 제대로 음악을 즐길 수 없을까?" 이는 청각 장애인들로 구성된 '싱 앤 사인(Sing&Sign)' 창단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바흐의 작품을 수화로 번역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청각 장애인들이 직접 번역에 참여해, 관객들의 이해와 몰입감을 높였다. 이렇게 출발한 싱 앤 사인은 레퍼토리를 넓혀 현재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와 여러 칸타타, 그리고 베토벤 교향곡 9번 등도 공연하고 있다.

글=박찬미(독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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