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상무대 일대, 백제시대 고읍터 가능성 크다”

정대하 2023. 12. 2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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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기 전 어떤 사람들이 살던 땅이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요새의 땅, 광주 상무대'(심미안 펴냄)를 최근 출간한 지역사 연구자 김정호(86·전 진도문화원장)씨는 28일 전화 통화에서 "광주지역사에서 구멍이 나 있는 상무대 얘기를 정리하는 것쯤은 손쉽겠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며 "옛 군 정보나 택지 개발사 자료 등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1백년도 되지 않은 광주 상무대의 역사 정리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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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 연구자 김정호씨
상무대 역사 정리한 책 펴내
옛 이름 군분·노치 등 토대로
토성 존재했을 가능성 제기
‘요새의 땅, 광주 상무대’ 저자 김정호씨. 광주문화재단 제공

“상무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기 전 어떤 사람들이 살던 땅이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요새의 땅, 광주 상무대’(심미안 펴냄)를 최근 출간한 지역사 연구자 김정호(86·전 진도문화원장)씨는 28일 전화 통화에서 “광주지역사에서 구멍이 나 있는 상무대 얘기를 정리하는 것쯤은 손쉽겠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며 “옛 군 정보나 택지 개발사 자료 등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1백년도 되지 않은 광주 상무대의 역사 정리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고 말했다. 김씨는 광주문화재단 지원을 받아 1990년대 이후 신도심으로 변한 ‘상무지구’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도록 ‘땅의 역사’를 복원했다.

상무대는 일제강점기 때 광주비행장이었다. 1939년 광산군 극락면 치평리 일대에 활주로를 만들어 조선총독부 체신국 산하 민간용 비행장으로 이용됐다. 일제는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비행장을 징발해 해군성 항공연습 기지로 활용했다. 일제는 1945년 2월 전쟁 막바지에 광주에 15개 이상의 일본군 여러 부대를 주둔시켰는데, 그 병영 중심지가 치평리 항공기지였다. 김씨는 “오늘날 상무지구 일부 토지는 일본 해군성이 사들이거나 징발했다”고 했다.

일본 군사기지로 쓰이던 광산군 극락면 치평리 비행장 일대는 1946년 1월 남조선 국방경비대 제4연대 병영으로 지정됐다. 광주 상무대에 전투병과통합교육대가 개설된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미군 자문단이 1951년 8월 교육총감부를 창설하고 장교 통합교육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김씨는 “미군은 일본군이 신병훈련을 했던 광산군 극락면 일대를 점 찍었다”고 했다. 정부는 장교교육기관인 보병학교를 광주로 이동시켜 교육총감 산하에 뒀다. 1952년 1월6일 광산군 극락면 치평리 현장에서 개소식을 연 뒤, 병영의 별칭을 상무대(尙武臺)로 명명했다. 김씨는 “전투교육사령부로 이름을 바꾼 상무대는 45년간 80만명의 장교가 교육을 받았던 한국군 장교의 요람이었다”고 말했다.

‘요새의 땅, 광주 상무대’ 표지.

상무대는 5·18과도 인연이 깊다. 1980년 5·18 때 계엄사령부 전남 분소, 합동수사본부 등 기능을 맡았고, 5·18항쟁 참여자들의 영창과 군사 재판소로 쓰였다. 상무대 교육부대와 지원부대들이 1995년 전남 장성으로 옮겨간 뒤, 광주시는 국방부에서 받은 땅의 1.7배 면적에 택지를 개발했다. ‘상무지구’엔 1998년부터 관공서와 주택과 상업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2004년 광주시청 청사가 완공됐다. 김씨는 “일본 전쟁기지로 쓰인 치평동엔 한국의 병영인 상무대가 들어섰고, 상무대 이전 이후 광주시청이 들어섰다”고 말했다.

병영으로 쓰이던 옛 상무대는 일제가 1914년에 붙인 치평(治平)동을 행정동 이름으로 쓰고 있다. 상무대 일대 조선시대 이름은 내정면과 군분면이었는데, 일제 때 생뚱맞게 극락면 치평리가 됐다. 김씨는 “일본 명치 천황이 평정한 땅이라는 뜻을 담았을 것 같다. 일제 강점기의 이름을 따 시청 동네 이름으로 삼은 어리석음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상무대 일대가 과거 광주고읍을 지키던 토성이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광주 관아는 기록이 없어 조선시대 광주 고을의 관아가 있었다던 광주 읍내 말고는 백제시대 광주 고읍(古邑) 위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조선시대 현 상무대 일대는 군대를 주둔시키던 요새라는 뜻의 군분면(軍盆面)이었다. 이 일대의 옛 지명 중 하나인 노치(老雉)의 치라는 말에서 옛 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 군분면이 광주 옛 읍성을 지키던 토성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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