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총리회담 불발 배경은 5·18..北 “전두환 지지 못한다”

김윤호 2023. 12. 28. 17: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80년 1월 北제의 총리회담 실무접촉
화기애애하다 5·18 직후부터 언쟁 벌어져
北 "학생·정치인 폭압하며 우리를 걸고 들어"
南 "대학생 2136회 방송 선동..내정간섭"
거기다 주한미군 철수 등 유도 문제제기
北, 속셈 지적 답 않고 "탄압자 지지 못해"
사료 '전OO' 기술..北 편지만 '전두환 군사파쑈독재'
지난 1981년 6월5일 당시 대통령 전두환씨가 북측에 남북한 최고책임자 회담을 제안하는 모습.(통일부 제공) /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1980년 진행된 남북총리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접촉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두고 언쟁을 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28일 공개된 남북회담 사료에서다. 5·18을 두고 우리 정부가 북한의 선전·선동에 탓을 돌린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12·12사태 직후인 1980년 1월 북한은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 등에 ‘대한민국’ 국호를 사용하며 전향적인 태도로 만남을 제의하는 서한을 보냈다.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후 단절한 남북 직통전화 재개통도 수용했고, 모스크바 올림픽 단일팀 회의도 제안했다.

북한의 이런 유화적인 태도에 남북총리회담을 위한 1~7차 실무접촉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러다 5·18일 일어난 직후인 5월 22일 8차 접촉부터 언쟁이 벌어졌다.

북측 수석대표인 현준국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은 “5월 17일 귀측 당국자들은 갑자기 우리를 걸고 남조선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이어서 포고령을 내리고 공공건물들과 대학들에 무장한 군인들을 들이밀어서 봉쇄했다”며 “(또) 천수백여명의 청년학생들과 정치인들을 체포 구금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폭압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현 대표는 그러면서 “외신들은 유신체제를 되살리기 위한 일종의 군사쿠데타이며 5·16군사정변을 방불케하는 사건이라 논평하고 있다”며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두고 “(그런데) 귀측 고위당국자는 지난 18일 이른바 특별담화라는 걸 발표해 대남적화책동이 격증됐다느니 남침의 결정적 시기를 노린다느니 하고 우리를 걸고 들면서 폭압 조치는 북으로부터의 위협 때문에 취했다고 역설했다. 대화 상대방인 우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발”이라고 쏘아붙였다.

이에 우리측은 1980년 3월 27일부터 5월 9일 사이 북측이 우리나라 57개 대학 학생들에게 움직이라는 내용의 방송을 2136회나 내놓은 것을 들어 “정의로운 투쟁을 운운하며 끝까지 떨쳐 일어나 싸우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선동이 아닌가”라며 “쌍방 체제 질서에 대한 간섭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박했다.

또한 북측이 남북총리회담 합의에 ‘합작’ ‘단결’ ‘자주적 평화통일’이라는 용어 사용을 고집하는 것을 두고 “주한미군의 철수와 반공정책의 철폐 및 공산주의자들 활동의 합법화 등을 요구하는 논거를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북측 문헌에 따르면 남북 합작은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자상으로 해 뭉치게 해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것’이라는 뜻이고, 단결은 ‘반공 소동을 그만두고 연공의 길로 나가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며, 자주적 평화통일은 ‘남조선에서 미제침략자를 몰아내고 북반부의 사회주의 역량과 남조선의 애국적 민주역량의 단합된 힘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정의돼있다.

그러자 북측은 “대화 일방을 있지도 않은 문제를 걸고서 헐뜯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 왜 이걸 대답 안 하나”라며 “투쟁에 일어선 인민들을 탄압하는 탄압자들을 지지해야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따져 물었다.

이 같은 언쟁은 10차 접촉까지 이어졌다. 북측은 우리 정부가 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명분으로 자신들을 이용하는 것을 문제 삼았고, 우리측은 북측이 실질적으로 협상에 임하지 않고 결렬을 유도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다 마지막 10차 접촉에선 북측 수석대표가 건강상 이유로 불참했고 11차 접촉 날짜까지 합의했음에도 북측은 협상 결렬을 통보했다.

이 과정에서 북측은 전두환 실명을 거론키도 했는데 사료에는 ‘전OO’으로 표기됐다. 다만 사료 9권 말미에 수록된 1980년 11월 11일자 북한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의 ‘남조선인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오는 ‘전두환 군사파쑈독재’라는 표현에서만 유일하게 실명이 나왔다.

(서울=연합뉴스) 통일부는 '남북대화 사료집' 제9권과 제10권 중 1979년 1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정치 및 체육분야 남북회담문서 965쪽 분량을 28일 공개했다. 사진은 1980년 2월 19일 판문점 판문각에서 열린 남북 총리간 회담을 위한 제2차 실무대표접촉 모습. [통일부 제공]

Copyright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