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앞에서 작아지는 공정위…규제 완화는 일사천리
공정거래위원회가 28일부터 시행하는 공정거래법 고발지침은 기존 원안과 다름없는 ‘개정안’이다. 당초 개정안에 담으려던 핵심조항인 사익편취 관련 총수 일가에 대한 ‘원칙 고발’ 방침이 빠졌다.
반면 대기업기준 완화 등 규제 완화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규제완화에만 의욕적인 공정위의 행보를 두고 본 업무인 대기업 경제력 집중에 대한 감시마저 느슨해 진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28일 공정위가 공개한 고발지침 개정안에는 고발 여부 결정과 관련한 고려 사항에 ‘시장에 미치는 파급효과’와 ‘중소기업 또는 소비자 등에 미친 피해 정도’가 추가됐다. 원안의 고려사항 중 ‘생명·건강 등 안전에의 영향과 무관한지 여부’와 ‘조사 협조 여부’는 각각 ‘생명·건강 등 안전에의 영향’, ‘조사·심의 협조 여부’로 수정됐다.
몇몇 표현에 손을 댔을뿐 개정안에서 다루려던 핵심 내용은 빠졌다. 지난 10월19일 고발지침 개정안을 행정 예고하며 강조했던 ‘법 위반 정도가 중대한 법인의 사익편취 행위에 지시·관여한 특수관계인(총수 일가)도 원칙적으로 같이 고발한다’는 내용은 개정안에서 제외됐다.
총수 일가 관련 내용이 제외되면서 중대한 사익편취 사건에서 총수 일가만 고발하지 못하는 맹점을 바로잡겠다는 개정안의 취지도 무색해졌다.
공정위 고발지침은 사익편취 행위를 이행한 임직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고발 기준을 정하고 있지만, 이에 관여한 총수 일가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기준만 정해놓고 있다. 그간 공정위는 사익편취 행위를 한 법인을 고발하면서도 사익편취에 관여한 총수 일가는 직접적인 지시 등 관여 정도를 명백히 입증하기 못해 고발에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개혁연대는 “사익편취행위를 한 법인을 고발할 정도로 중대한 법위반 행위라면, 총수 일가의 지시나 관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공정위가 밝혀내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라고 지적했다.
사익편취 행위에 관여한 총수 일가에 대한 ‘원칙 고발’을 담았던 공정위의 고발지침 개정안은 최근 법리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최근 법원은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관여 행위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고, 고발지침 개정안은 이 같은 법원의 판결 취지를 담아 마련됐다.
하지만 재계는 총수 일가의 원칙 고발은 상위법인 공정거래법에 위배되고 기업 활동이 위축된다며 반발했고 공정위는 재계의 지적을 받아들였다.
공정위는 “당초 취지를 오해해 특수관계인의 지시·관여 사실을 입증하지도 않고 무조건 고발하려고 한다는 등의 의견이 제기됐다”며 “이러한 오해는 지침 예고안의 문언상 표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어서 지침 개정보다는 법 집행을 통해 당초 취지를 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계의 오해라면서도 재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정을 전면 철회한 공정위의 판단은 석연치 않다. 특히 행정예고 기간에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개정안을 수정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번처럼 백지화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김우찬 고려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이번 고발지침 개정 불발은 공정위가 재계 압력에 불복한 것”이라며 “향후 사익편취 사건에 있어서 정당한 법집 행을 하는지 지켜 볼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공정위는 대기업 관련 규제 완화에 적극 앞장서고 있다. 올해 초부터 추진해 온 공시대상기업집단 기준 완화 작업은 관련 연구 용역을 마치고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었다.
현재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기준은 자산규모 5조원 이상이다. 공정위는 공시기업집단 기준을 국내총생산(GDP)과 연동하거나 기준금액을 상향한다는 방침이다. 기준 완화를 통해 공시대상기업집단에서 제외되면 계열사 간 주식 소유현황과 특수관계인과의 거래 현황 등 각종 공시 의무에서 벗어나게 된다. 일감 몰아주기 등 사익편취 규제도 적용받지 않는다.
공정위가 지난 27일 입법예고한 동일인 판단 기준에 관한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도 규제 완화에 속한다. 이번 시행령 개정으로 ‘외국인 총수’인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은 동일인 지정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국내 대기업집단 역시 개정된 기준을 악용해 사익편취 규제를 회피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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