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없는 코미디에 뒤집어지는 MZ
소극장 공연에 매진 행진
정치·19금 性 등 성역없는
스탠드업 코미디에 열광
전국 팔도 MZ들 몰려와
술 마시며 관람 즐겨
"영하 4도 날씨에 정신 못 차리고 나와줘서 고맙습니다. 뭔가를 얻어갈 생각 말고, 다 내려놓고 간다는 생각으로 웃어주세요." (코미디언 김동하)
TV에서 사라진 코미디가 라이브 공연장에서 부활했다. 몸으로 웃기는 슬랩스틱, 미리 짠 단막극 연기를 선보이는 콩트도 아닌, 마이크 하나 잡고 말로 승부를 보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인기다. 서울 종로, 압구정, 홍대 등지에 전용 공연장이 생겨 매회 매진 행렬이고, 대니초·김동하 등 베테랑 코미디언은 올해 전국에서 각각 1000여 명 관객을 동원하며 투어 공연도 열었다.
지난 주말에도 서울 종로의 옛 우미관 건물에 있는 서울코미디클럽 앞엔 영하권의 추운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긴 줄이 늘어섰다. 이날은 김동하·대니초를 비롯해 6명의 코미디언이 약 20분씩 무대에 오르는 '올스타스' 공연이 열렸는데, 무대 가까이에 앉아 호스트(사회자)가 던지는 짓궂은 농담, 즉석에서 티키타카의 묘미를 즐기려는 이들이 선착순 앞 좌석을 맡느라 일찍부터 공연장을 찾은 것이다.
무대 위엔 스탠드 마이크뿐이다. 100여 명 관객을 맨몸으로 마주한 코미디언은 미리 갈고닦은 농담에 즉석 애드리브를 곁들여 쉴 새 없이 관객을 웃겨야 한다. 정치·성·인종·장애 등 금기 없이 선을 넘나든다. 무대 위에선 대통령, 부모, 성적 경험 등이 다 코미디의 소재며, 미리 공지됐듯이 수위는 19금이다.
관객의 평가는 때론 냉정하다. 대체로 웃고자 찾아오는 이들이지만, 무반응이거나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이날 서울코미디클럽 무대엔 처음 섰다는 한 출연자는 몇 차례 농담을 시도하다가 미지근한 반응에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뒤 5분도 채 되지 않아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대신 진행자가 다시 무대로 올라가 분위기를 정리한 뒤 노련한 코미디언 박철현을 무대로 불러냈고, 그는 20분 가까이 준비한 농담을 이어가며 웃음 폭탄을 터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 공연장은 2021년 12월 문을 열고 2년째 영업 중이다. 서울코미디클럽을 운영하는 공연기획사 LMPE의 김단 대표는 "초기엔 주말 관객도 10명 내외였는데, 1년이 지나면서부터 매회 130석이 꽉 차고 있다"며 "이 공연장에 한 달에 3000여 명, 1년에 5만여 명이 찾는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서울 마포구의 홍대 삼거리 인근에 새로 개장한 메타코미디 클럽도 관객들로 붐볐다. 메타코미디는 최근 유튜브에서 핫한 채널 피식대학·빵송국 등의 인기 코미디언들이 소속된 레이블로, 지난 22일 전용 극장을 열었다. 110석 전석 매진에 공연 전부터 '오픈런' 줄이 늘어선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다.
특히 최근엔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스탠드업 코미디 실황 영상이 퍼지면서 통쾌한 입담에 호기심을 갖는 이들이 늘었다. MZ세대의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소비 성향과 맞물려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분석이다. 김 대표는 "스탠드업은 왜 웃긴지를 설득하지 않는다. 웃기면 웃고 말면 마는 '개인 취향'이 두드러지는 장르"라며 "남들 신경 안 쓰고 알아서 즐기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채림 메타코미디 공연 헤드매니저는 "새해 소비 키워드로 '분초 사회'가 꼽힐 만큼 시간을 중시하는 시대인데, 반대로 재밌고 가치가 있는 것엔 얼마든지 시간과 돈을 쓰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관객들은 '현장성'을 느끼기 위해서라면 먼 거리도 기꺼이 찾는 듯했다. 서울코미디클럽 객석에서 만난 김태욱 씨(28)는 "전남 진도에 사는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숏폼 영상으로 처음 접한 뒤 궁금해 기차·버스 타고 서울로 왔다"고 했다. 부산에서 친구와 함께 온 임윤정 씨(35)도 "서울에서 볼거리를 찾아보다 알게 됐다"며 "매진만 아니라면 또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순간 불어온 열풍은 아니다. 2010년 웃찾사 폐지, 2020년 개콘 폐지 등 방송가 코미디의 암흑기에 스스로 무대를 일군 코미디언들이 있었다. 지금은 270만 구독자를 보유한 대형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멤버 이용주, 정재형, 김민수와 코미디언 박철현 등이 2018년께 의기투합한 게 시작이었다. 스탠드업 무대에선 공채 출신 개그맨이 아니어도, 지상파 검열을 거치지 않아도 웃기기만 하면 누구나 코미디언이 된다. 마침 미국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재미교포 대니초가 귀국해 이들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신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어느덧 '생태계'도 구축됐다. 서울코미디클럽·메타코미디클럽 같은 100여 석 규모 공연장은 업계에선 꿈의 무대다. 관객에게 1명당 최소 2만~3만원대 입장권을 파는 만큼 검증된 이들만 오를 수 있다. 대신 도전자의 무대 '오픈 마이크'가 용산, 성수 등에 마련돼 있는 식이다. 인기 공연은 영상화로 수익 모델을 찾기도 한다. 새해에 대니초의 전국투어 실황이 CGV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스탠드업의 매력 중 또 하나는 식음료를 곁들여 웃고 마시며 볼 수 있는 공연이란 점이다. 말장난의 흐름을 쫓아가기 위한 집중력은 요구되지만, 깊은 고민은 대체로 코미디언의 몫이다. 관객은 그저 웃다가 다 비워내고 가면 그만이다. 이 매니저는 "짧은 웃음을 위해 코미디언 한 사람이 흘리는 피땀눈물이 엄청나다. 이들이 지치지 않고 관객과 함께 웃는 극장을 만들고자 한다"며 "스탠드업 외에 만담 등 다양한 코미디 콘텐츠를 통해 파이를 키우고, MZ세대뿐 아니라 중장년층도 즐길 수 있는 공연 문화를 만들겠다"고 전했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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