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경식 순례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한겨레 2023. 12. 28.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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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부고를 듣고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의 책을 꺼내 하나씩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에게 서경식은, 그런 약력을 아득히 초과하는 이름이다.

당시엔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 결국 그것은 서경식이 말한 '국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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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2022년 5월22일 인천 중구 경동 애관극장에서 진행된 제10회 디아스포라영화제에 참석한 서경식 일본 도쿄경제대학 명예교수. 인천시 영상위원회 제공

박권일 | 독립연구자·‘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난데없는 부고를 듣고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의 책을 꺼내 하나씩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처럼 나도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통해 그를 처음 알았다. 서경식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서승·서준식의 동생으로, 아름다운 글을 쓰는 에세이스트이자 대학교수로 소개되곤 했다. 틀리지 않다. 그럼에도 나에게 서경식은, 그런 약력을 아득히 초과하는 이름이다.

신출내기 기자 시절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육성으로 듣는 서경식의 언어는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인상적인 건 생활에 배어든 성찰적 교양이었다. 그는 동거인을 “쓰마”(妻, 아내) 대신 “파트너”라 불렀다. ‘파트너’란 말을 그렇게 쓰는 걸 처음 겪어본 나는 순간적으로 누구를 말하는지 헷갈려 버벅거렸던 것 같다. 그는 웃으며 연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는 남편을 ‘슈진’(主人, 주인)이라고 부르는 일본의 지독한 가부장주의를 예로 들면서 한국과 일본의 많은 지식인이 공적 자리에서 누구보다 진보적인 반면 가족이나 사적 인간관계에서 지극히 보수적이라고 꼬집었다. 서경식의 어느 책에는 한국의 유명한 진보적 철학자와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는 서경식과 대담한 뒤 “저보다 연배가 위이시니 ‘형님’이라 부르고 싶다”고 청한다. 서경식은 단칼에 거절한다. 서양의 개인주의를 좇아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가족주의의 폐해가 훨씬 크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서경식은 한결같이 국가폭력을 비판해왔지만, 한편으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진보·리버럴의 논리 역시 누구보다 예리하게 비판한 전투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국민주의’(Gugmin-ism)라는 단어를 통해서, 일본 사회에 만연한, 그러나 서구의 ‘내셔널리즘’ 개념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차별의식을 정밀 타격한다. 다음 문장은 길지만 인용할 가치가 충분하다.

“‘국민주의자’는 자신을 내셔널리즘에 반대하는 보편주의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이 누리는 여러 권리가 근대 국민국가에서 만인에게 보장되는 기본권이라기보다는 ‘국민’이라는 것을 전제로 보장되는 일종의 특권이라는 현실을 좀처럼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국민주의자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에 대한 자각이 없고, 그 특권의 역사적 유래에는 눈을 감으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국민주의자는 외국인의 무권리 상태나 자국이 저지른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책임에는 둔감하거나 의도적으로 냉담하다. 국민주의는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배타적인 ‘국가주의’와 공범 관계를 맺게 된다.”(‘일본 ‘국민주의’의 어제와 오늘’, ‘지구화 시대의 연대와 소통’ 국제학술대회 발표문, 2006)

이런 인식은 ‘자이니치’라는 경계인으로서의 자각과 필연적으로 이어져 있지만, 무엇보다 일본 사회에서 진보나 리버럴로 분류되는 인사들, 예컨대 와다 하루키나 우에노 지즈코 같은 이들의 주장에 대한 치열한 반박을 통해 벼려진 것이었다.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와의 대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와 같은 책에서 우리는, 식민주의는 물론이고 역사수정주의, 그리고 이른바 양심적 리버럴의 요설에 맞서는 ‘논리적 투사’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나는 이 지면에서 ‘회원제 민주주의’(membership democracy)를 말한 적이 있다. 회원제 민주주의란 한마디로 ‘울타리 안 평등에는 민감하지만 울타리 밖 비참에는 무관심한 민주주의’다. 당시엔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 결국 그것은 서경식이 말한 ‘국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말한 아르케(arkhe) 논리, 즉 출생·재산·능력에 따라 위계적으로 몫을 배분하는 불평등의 논리다. 또한 이는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이 말한 ‘자격적합성의 정치’, 즉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특권의 분배를 마치 불편부당한 공정의 실현인 양 가장하는 정치이기도 하다. 이 모두와 공명하는 이념이 바로 능력주의(meritocracy)다. 보편적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은 승자·강자의 기득권을 옹호하며 약자·소수자를 억압하는 선별적 정의론. 서경식이 평생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운 추악함이다.

이제 서경식의 생물학적 삶은 닫혔다. 그러나 심원한 지성은 영원히 열려 있기에 그와 함께하는 순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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