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면 짓고 또 지은 “재생과 부흥의 고도” 교토
[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교토,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재건돼
오래된 고도여도 근세 이전 건물 적어
일본에서 가장 높고 오랜 도지5층탑
지금의 탑, 4번 불타고 5번째 지은 것
교토역빌딩, 화재 등으로 4번째 지어
“역사도시의 미래”라는 의미 받으면서
도지5층탑과 함께 교토 어제·오늘 상징
“우리 황룡사9층탑 언제 다시 지을까”
‘역사문화관광도시’ 교토의 랜드마크는 어디일까?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교토시 남쪽 시모교구에 있는 교토역과 역광장 앞에 우뚝 선 교토타워가 될 것 같다. 고대에는 이 역할을 도지(東寺) 절과 55m 높이의 도지5층탑(미나미구)이 했을 것이다. 옛날에 오사카와 나라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은 멀리 5층탑 꼭대기가 아스라이 보이면 ‘교토가 가까웠음’을 알았다고 한다. 거대한 초현대식 역(驛)건물인 ‘교토에키비루’(교토역빌딩) 옥상정원에서는 남서쪽으로 이 도지5층탑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인다.
1997년 지어진 교토에키비루에서 883년 처음 지어진 도지5층탑을 바라보며 역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 교수의 말을 떠올려본다.
“불사조의 도(都).”
화재와 전란으로 여러 차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음에도 그때마다 기적처럼 재건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교토는 794년 일본 수도 헤이안쿄(平安京)로 건설된 뒤 도시를 폐허로 만든 대재난이 4차례 있었다. 1177년 대화재로 교토가 불탄 이래, 1467년부터 약 10년간 계속된 내란(오닌의 난) 때는 인구가 12만에서 5만으로 줄 정도였다. 1788년 대화재 때는 1424개의 마치(마을)가 불에 탔고, 막부 말기인 1864년에 벌어진 ‘금문의 변’ 사건 때는 2조에서 7조까지의 도심 지역이 불길에 휩싸였다고 한다. 1461년의 대기근 때는 교토 지방의 아사자가 8만2천여 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교토에 ‘어령신앙’(억울하게 죽은 원령의 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이 뿌리깊은 이유도 이런 민중의 고통과 원한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대재난을 뚫고 기적처럼 도시가 재건될 수 있었던 것도 ‘대도시’에서 삶을 영위하고자 한 교토 사람들의 강한 의지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도지5층탑은 이 “불사조 교토”의 상징과도 같은 목조건축물이다. 비록 처음 지어질 당시의 탑은 아니지만, 지어진 그 자리를 지금껏 지키고 있는 보기 드문 ‘현존 유적’이다. 현재의 도지 건축물과 5층탑은 17세기에 새로 지은 것들이다. 특히 5층탑은 처음 세워진 뒤부터 1635년 4번째로 불탈 때까지 소실과 다시 짓기를 거듭하다가 1644년 현재 모습으로 재건됐다. 그야말로 4전5기의 탑이다. 현존하는 일본 고탑 중 가장 큰 키를 자랑하는 도지5층탑은 지금도 ‘역사문화 도시 교토’의 얼굴 구실을 하고 있다. 연꽃이 가득 핀 커다란 연지 뒤로 마치 관음보살처럼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늠름하고 아름다워 웨딩사진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교토의 도지는 헤이안쿄 조성 당시 도성 안에 허용된 2개의 절 중 하나였다. 당시 일본 조정은 승려의 지나친 정치 개입을 우려해 도성 문안 양쪽에 동사와 서사(西寺), 두 개의 관사만 허락했다. 이후 서사는 도시의 서쪽 지역이 황폐해지면서 없어졌고, 일본불교 진언종의 개조 ‘구카이’(空海) 고보(弘法. 774~835) 대사가 전도를 위해 들어온 동쪽의 도지만이 서민들의 신앙처로서 살아남게 됐다.
일본 민중에게 구카이는 ‘고보상’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엄청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승려였다고 한다. 도지가 여러 차례 재난을 겪고 폐사 위기에 몰리면서도 그때마다 재건에 성공한 것은 고보상에 대한 민중의 신앙을 정치권력이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보상은 서민을 위해 도지에 시장을 열기도 했는데, 그의 사후에도 이것이 전통이 되어 대사의 기일인 매달 21일 1천여 개 노점에 20여만 명이 붐비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다. 교토 북쪽 기타노텐만구의 벼룩시장(25일)과 더불어 교토의 특별한 풍물이 되어 있다. 15세기 초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돈을 받고 차를 파는 가게가 등장한 곳도 이 도지라고 한다. 조선초에 편찬된 <고려사>에 “절에서 국수를 팔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한국과 일본 절에 시장이 섰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도지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많은 문화재를 가진 명소의 하나이다. 오층탑을 비롯해 금당, 대사당(서원어영당)은 국보이고 강당 안의 불상 21구는 일본 밀교조각의 대표작들로서 모두 국보와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대사당 앞에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글 한 토막이 걸려 있다. 시바는 연말연시를 교토호텔에서 보내곤 했는데, 찾아오는 손님에게 꼭 고보상의 거처였던 대사당 앞에서 만나기를 청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천년고도’ 교토에 대한 예의일 것 같고 또 민중을 사랑한 고보상의 마음을 기리는 자세 같기도 했다는 소회가 적혀 있다.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지기는 현대의 관문 교토역도 같은 운명이었다. 처음 교토 부근을 지나는 군수 목적의 역이었다가 1914년 근대적인 역사가 들어섰고, 1950년 화재(직원의 다리미 과열이 원인이었다고 한다)로 불타 다시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교토에키비루는 정도 1200년을 기념해 지은 네 번째 교토역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모당선작이 초현대식 건물이어서 “교토의 역사 경관을 해친다” “교토를 분단하는 장벽이다”라는 거센 비판 속에서 건축이 시작됐다고 한다.
교토에키비루는 교통 기능은 물론 호텔, 백화점, 유흥시설 등이 들어선 복합상업건물이다. 바로 뒤에 고속버스터미널도 있어서 명실상부 교토의 관문 역할을 한다. 지상 16층(지하 3층)에 높이 60m, 동서길이 470m의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건축가는 하라 히로시. 오사카 우메다스카이빌딩(1993), 홋카이도 삿포로돔(2001) 등을 지은 건축가이다.
교토에키비루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 4천 장의 유리로 둘러싸 교토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 공중경로 스카이웨이, 그리고 일본 전통 건축양식의 하나로 천장이 없는 실내계단 ‘후키누케’이다. 실내계단은 높이 50m에 가로 폭이 150m에 달하는 규모로 콘서트와 이벤트 무대로도 활용한다. 16층의 옥상까지는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한다. 후키누케 주위에는 각종 식당과 상점, 극장, 미술관 위락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새 교토역사 건축 공모 당시 유력한 후보의 하나였던 안도 다다오 안은 고대 교토의 관문인 라쇼몬(羅城門)을 재해석한 것이었는데, 심사위원들은 역시 ‘문’을 모티브로 삼아, 문(건물) 안으로 길이 지나가고, 문루(건물 옥상정원과 스카이웨이) 위에서 교토 시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한 하라 안을 “역사관광도시로서 보다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어쨌든 오늘날 교토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토에키비루의 전체 규모를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친다. 볼거리 많은 고대 역사문화 도시에 와서 빌딩 구경에 시간을 투자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도지5층탑이 고대 교토를 상징하듯이, 교토역사 ‘교토에키비루’가 현대 교토를 대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필자가 처음 교토에 왔을 때 도시샤대학의 한 교수님이 “교토역을 꼭 한번 둘러보라”고 권유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말뜻을 이해하게 됐다.
교토에키비루에서 도지5층탑을 바라보노라니 필자가 한국인이기 때문일까. 1238년 몽고군에 의해 불탄 뒤 다시 지어지지 못한 황룡사9층탑의 운명이 언뜻 뇌리를 스쳐간다. 우리의 황룡사9층탑은 다시 세워질 수 있을까?
지금 대한민국이 “돈이 없고 가오가 없어서” 못 짓는 건 아닐 터이다. 한류의 물결이 세계를 넘나드는 오늘, 중국인이 보면 장안(현재의 시안)의 대안탑(大雁塔) 같고, 일본인이 보면 도지5층탑 같았을, 장안과 헤이안쿄 사이의 ‘천년고도’ 서라벌의 우뚝한 랜드마크를 보고 싶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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