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史官)’에도 겁줬나… 1981년 남북대화사료집에 전두환 익명표기

김예진 2023. 12. 2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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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공개된 남북대화사료집 10권 일부다.

통일부가 28일 남북대화사료집 제9·10권을 공개했다.

통일부는 대외비 자료였던 남북대화사료집을 2022년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특히 전두환 집권 직후인 1981년 1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최고책임자 상호방문 및 회담제의 등에 관한 사료를 모아둔 제 10권 속에는 전두환의 이름이 다수 '전○○'으로 표기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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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 스스로 남조선의 최고책임자연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전적으로 비법적이다’, ‘전○○은 바로 이 몸서리치는 동족 학살만행을 직접 진두지휘한 살인의 괴수이며 민족의 백정이다’,  ‘전○○이 감히 남조선의 최고책임자로 자처하면서 상호방문을 떠드는 것은 무뢰한의 망동이다’, ‘전○○은 우리와 상종할 상대로 될 수 없다’
남북대화사료집 10권 속 북한의 전두환 비난 부분이 익명으로 처리된 모습.  사료집 캡처
28일 공개된 남북대화사료집 10권 일부다.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어야 할 사료에 유례없이 익명으로 기재된 부분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11·12대 대통령 전두환이다.

통일부가 28일 남북대화사료집 제9·10권을 공개했다. 통일부는 대외비 자료였던 남북대화사료집을 2022년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대북정책 투명성과 국민 알권리를 위한 취지다. 이번 공개는 4차 공개로, 통일부 전신인 국토통일원이 1979년부터 1981년까지 모은 자료가 해당된다. 남북회담사와 남북 접촉 관련 회의록, 남북의 성명, 기자회견문, 당시 국내 언론보도 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전두환 집권 직후인 1981년 1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최고책임자 상호방문 및 회담제의 등에 관한 사료를 모아둔 제 10권 속에는 전두환의 이름이 다수 ‘전○○’으로 표기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 연설이나 목차 등에는 이름이 정상적으로 기재돼 있지만, 북한이 대통령을 비난하는 부분은 이름을 그대로 살려 싣지 않았다. 가령 1981년 1월 12일 전두환 대통령의 김일성 주석 서울 초청 연설에는 ‘전두환’ 이름이 정상 표기돼 있지만, 1981년 1월19일 이를 거부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김일 위원장의 대남 성명 속에서 전두환은 모두 ‘전○○’으로 수정돼있다. 당시 남북대화 사료 수집 업무를 맡은 실무자가 스스로 고친 것인지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는지 현 시점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전두환 집권 직후 신군부의 서슬퍼런 통치를 엿볼 수 있다는 평가다.

또한 이번에 공개된 사료집 9권에는 남북 탁구 단일팀 논의 불발의 막전막후도 담겨 있다. 1979년 2월, 북한은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평양유치에 성공해 남한에 단일팀 구성을 제안해왔다. 판문점에서 남측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과 대한탁구협회 채영철 회장, 북측 체육지도위원회 김유순 위원장, 북한탁구협회 회장 김득준 등과의 회의에서 평행선 논의가 드러났다.

당시 북한은 단일팀 구성을 제안하고 구성 방식, 양측 국호 대신 ‘고려’라는 단일팀명, 평양에서의 훈련 방식과 장소 등을 상세하게 제안했다. 남측은 단일팀과 남북 체육교류에 찬성한다면서도, 회담 첫날부터 혹시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남측의 단독 출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줄 것을 요구했다. 북측은 단일팀에 찬성한다면서 그런 요구를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하며 단독 출전 보장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자 남측은 합의 불발을 선언하며 다음차 회의에도 나오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남측 선수들은 평양에서 비자를 주지 않아 대한민국팀 단독으로도 출전을 하지 못했다. 당시 남측은 애초부터 단일팀보다 단독팀으로 진출할 전략을 수립한 상태였다. 남측은 회담 후 국내 기자들에게 언론브리핑을 할 때에도 단일팀에 찬성하나 북한이 자세한 내용을 들고나오지 않아 진정성이 없다는 취지로 대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남북탁구단일팀은 12년 후인 1991년 성사됐고 현정화·리분희의 금메달 스토리는 2012년 ‘코리아’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됐다.

한편 이번 4차 사료공개에서도 약 30%는 검은 칠을 하고 비공개됐다.  3차공개때 비공개율은 14%였던 것에서 두배 증가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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